1. 우정을 위한 이별은 1-3.
“가영아, 넌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 있니?”
개찰구를 빠져 나오며 범수가 가영이에게 물었다.
“하하 그럼요. 저라고 사랑 한 번 안해 봤겠어요?”
가영이가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범수는 갑자기 이상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 몇 명이나 만났는데?”
“에이! 오빠, 그건 프라이버시, 몰라요?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실례라구요. 노코멘트입니다.”
가영이 질색을 하며 말하는 바람에 범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묘한 호기심이 계속 발동을 했다.
“그럼 지금 만나는 사람은 있어?”
“아뇨, 지금은 없죠.”
가영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 생각나니?”
범수는 가영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음, 글쎄요. 뭐 생각날 때도 있고. 하지만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가영이는 한동안 생각하더니 별 의미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래도 한때 좋아하고 그런 사이였잖아?”
범수는 계속 가영이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에이, 오빠는 왜 자꾸 그런 거 물어봐요? 오빤 그럼 지나간 사람들 생각하고 그래요?”
가영이는 범수의 질문이 기분 나쁜 지 되물었다.
“그냥 문득문득 생각날 때가 있긴 하지.”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도요?”
범수의 대답에 가영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 아니 그럴 때는 없지.”
범수가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는 거 같아서 대답을 얼버무리고 바로 가영에게 질문을 했다.
“넌 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이미 헤어진 사람 생각하면 뭐해요. 다시 만날 것도 아닌데.”
가영이는 여전히 시원스럽게 대답을 했다.
“그래도 혹시 만약에 그 사람이 돌아와서 다시 사귀자고 하면?”
“글쎄요. 그럴만한 사람이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그랬으면 헤어졌겠어요?”
범수의 집요한 질문에 가영이는 여전히 쉽게 빠져나갔다.
“하하 한 두 명은 아닌가 보네.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 있잖아.”
“오빠! 아까 개인 프라이버시라고 했죠? 이제 그만하세요.”
가영이가 길을 가다 멈추고 눈을 흘기며 범수를 바라봤다.
“알았어. 미안해. 그럼 새로운 사랑을 기대하니?”
“새로운 사랑이라 …….”
범수의 질문에 가영이는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말을 멈췄다.
“모르겠어요. 그보다는 그냥 과거의 사랑은 잊는 거죠.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잘 해주고 싶은 거죠. 오빤 안 그래요?”
“그치, 당연한 거지. 새로운 사람에게 잘 해야지.”
범수는 그렇게 말하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범수의 마음속에는 그동안 사귀었던 연인들이 집주인처럼 각자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범수의 방에서 나가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범수가 일부러 내보내려 하지도 않았다. 범수의 마음에는 과거와 현재가 항상 공존했었다. 그리고 현재의 연인과 잘못되면 범수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방의 여인들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방 여인들의 문을 두드리지는 못했다. 지원이에게 조차 범수는 단 한 번도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었다.
‘풍요속의 빈곤이고, 빈곤의 악순환이라고 했던가? 내 상황과 다를 게 없는 거 같네.’
범수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예식장은 유럽의 성을 옮겨 놓은 듯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뾰족한 성루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범수는 식장에 들어가지 않고 한동안 그렇게 예식장 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범수야 니 편지 받고 너무 설레고 좋았어. 우리 2학기 때는 더 친하게 지내자. 빨리 개학을 했으면 좋겠다.’
‘중학생이 되니 학교가 달라서 자주 얼굴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연락 자주하고 살자.’
‘우리 대학교 가서도 우정 변치 않고 잘 만나자.’
‘니가 벌써 군인 아저씨가 되어서 편지를 보내니 좀 어색하네. 면회는 못 갈 거 같아. 많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기다리지 마. 미안.’
범수는 어제 지원의 편지를 정리하면서 봤던 편지 속 내용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 보다는 미처 알지 못한 지원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범수는 지원이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범수는 망설였을 뿐 지원이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거 같았다. 지원이가 설정한 거리를 범수는 허물지 못했었다. 아니 그보다는 범수 자신이 설정한 거리를 깨기가 두려웠었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지원이는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린 걸까?’
범수는 예식장 입구에서 크게 호흡을 했다. 가영이는 그런 범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친구 결혼식장 가 봤었니?”
“아뇨 아직 제 친구들은 결혼하려면 멀었죠. 졸업도 안했는데.”
가영이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너도 곧 자주 갈 날이 올 거야.”
범수는 풀어진 넥타이를 목까지 올리면서 가영이를 바라보았다. 범수는 처음 여자 동기 결혼식에 간 날이 문득 떠올랐다. 그 친구는 졸업을 하자마자 결혼을 했었다. 그때 처음 간 어색함이 오늘 갑자기 다시 느껴졌다.
범수는 지원이의 마지막 통화가 생각났다. 결혼 전에 보기로 했던 지원의 결혼 상대자와의 만남은 보기 좋게 취소가 되었다. 지원이는 그 이후로 범수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범수도 지원이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지원이가 범수에게 결혼식장에 오지 말라는 얘기를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된 거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범수의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잘 살 때야 문제가 없겠지만, 혹시라도 나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나쁘게 흐른 다면 어쩌지? 설마 그렇게 까지 갈까? 지원이하고 나하고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
범수는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갖고 소심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내일도 아닌데 내가 왜 남의 사생활까지 걱정해야해?’
범수의 머릿속은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갈피를 못 잡았다.
‘근데 그 사람이 믿어 줄까?’
‘차라리 그 사람이 나란 존재를 몰랐던 게 나았을 수도 있었겠다.’
범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펴며 이런 저런 생각에 휩싸였었다.
‘아니야, 안 일어난다고 장담할 수 없어. 나 때문에 두 사람이 이상해지는 건 좋은 일이 아니야.’
‘결혼식장에서 그 남자가 나에게 두 사람이 어떤 사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지?’
‘지원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고 물어볼까? 아냐, 그런 질문은 안하겠지.’
‘사귀는 사람 있냐고 물어볼까?’
범수는 어느 순간부터 결혼식장에 가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친구를 데리고 갈까?’
범수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제는 누구랑 함께 갈 것인가가 고민이 됐었다.
‘누구에게 부탁하지?’
범수는 주변의 선배나 동기, 후배들을 생각 했다.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면서 오해하지 않을 사람을 생각해 봤지만 막상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차에 교양 수업을 같이 듣는 가영이가 눈에 들어왔었다.
“가영아 주말에 뭐하니?”
범수는 교양과목을 마치고 난 후 가영이에게 커피를 사주며 물었다.
“뭐 특별한 일 없는데요. 왜요? 영화라도 보여 주실려구요?”
가영이가 커피를 받아들며 특유의 해맑은 미소로 범수에게 물었다.
“나하고 예식장 갈래? 영화는 그 다음에 보여줄게.”
범수가 웃으며 가영이에게 말했다.
“네?”
가영이는 범수의 뜬금없는 제안에 놀란 표정으로 범수를 바라보았다.
“친구 녀석이 결혼을 하는데 나 혼자가기 뭐해서. 너하고 같이 가면 좋을 거 같아서. 괜찮으면 같이 가자. 내가 맛있는 것도 사줄게.”
“근데 제가 가도 되는 자리여요?”
가영이는 주저하며 물었다.
“그럼. 부담 가질 일 아니니 괜찮아.”
“네, 뭐, 좋아요 그럼.”
가영은 쿨 하게 범수의 부탁들 받아들였다.
“역시 가영이 너 밖에 없다. 고마워.”
가영이는 같은 과는 아니었지만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후배였다. 그러다 이번 학기에 같이 교양 수업을 들으면서 친해졌었다. 4학년 마지막 학기에 듣는 교양수업이었고, 과에서는 범수 혼자만 듣는 수업에 가영이는 단비 같은 존재였었다. 거기에 낯가림이 심한 범수에게 가영이는 항상 먼저 다가와 인사를 했었고, 범수를 잘 챙겨 주었다. 범수는 가영의 모습을 보면서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가영아, 넌 그냥 내 옆에만 있으면 돼 알았지?”
“네, 근데 왜 제가 따라와야 하는지 예식장 가면 말해준다고 했잖아요?”
가영이가 범수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범수는 흠칫 놀라며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으 응, 말해준다 했지?”
범수는 사람들이 적은 로비 한쪽으로 가영이를 데리고 갔다.
“가영아, 오늘 결혼하는 친구는 아까도 말했지만 내 초등학교 여자 친구야. 서로 허물없이 잘 지내는 친구인데 그러다 보니 그게 화근이 돼서 너에게 부탁을 하게 됐네.”
“…….”
“그게 사실은 말이야.”
범수는 가영이에게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니 나 혼자 오기가 좀 부담되기도 하고 걱정이 되더라. 그렇다고 유일한 초등학교 친구인데 안 올 수 도 없는 일이고 ……. 그래서 네게 부탁을 한 거야. 니가 그래도 잘 이해해 줄 거라 믿고. 이렇게라도 하면 그 사람이 조금은 안심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 …….”
“오빠라면 그럼 이해할거 같아요?”
가영이가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범수에게 물었다.
“글쎄, 그래도 혼자 온 것 보다는 안심하지 않을까? 내가 혼자인 걸 알면 계속 신경 쓰일 거 같아서.”
범수도 가영이가 묻는 질문에 몇 번이고 되뇌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방법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냥 어찌 됐건 앞으로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내 얘기는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맘이야. 이제 와서 모르는 사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정말 연인 사이도 아니었고. 오해 받기 싫은 거야.”
범수는 가영이에게 에둘러 말했다.
“오빠는 정말 그 친구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어요?”
가영이가 범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왜?”
“오빠가 이렇게까지 하는 행동이 이상해서요.”
범수의 물음에 가영이가 웃으며 말했다.
“뭐가?”
“아무런 관계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는 친구사이고, 오빠가 그 분에게 전혀 감정이 없었다면 그냥 그런 거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올 수 있는 거 아닌가요?”
“…….”
범수는 가영이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냐, 그런 거, 그냥 난 아까도 말했지만 두 사람이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런 거야. 남자라면 한 번쯤 아내의 과거에 대해서 궁금해 할 수 있는 거니까?”
범수는 가영의 말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심어주듯 말했다.
“그런 걸 왜 궁금해 해요? 남자들은 이해가 안가요. 지나간 과거를 알아서 뭐가 좋은데요? 전 그런 사람 만날까봐 정말 남자 만나기 싫어요.”
가영이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건가?”
범수가 주저하며 물었다.
“당연하죠?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건 의심하는 거잖아요?”
가영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한 거지.”
범수의 목소리는 어느새 가영이의 기세에 눌려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 얘기를 알아서 뭐가 좋다고요. 그런 얘기 들으면 오빠는 기분 좋아요?”
“…….”
범수는 가영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얘기들을 듣고 나면 그것 때문에 둘 사이가 더 안 좋아지지 않을까요?”
“그래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다면 차라리 속 시원하게 다 얘기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어느새 범수는 가영의 말에 빠져 들고 있었다.
“그럼 솔직히 얘기하면 남자들은 다 믿어요?”
가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사그라 들지 않고 범수를 구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믿어야지. 그럼 안 믿으면 어떡해?”
범수는 더 이상 가영의 말에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뇨. 뭔가 더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물어볼걸요? 남자들은 정말 이상해요.”
가영이는 기분이 상했는지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범수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야 남자라고 다 같냐? 난 안 그래.”
“에이, 오빠도 그럴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신경 쓰는 거잖아요. 상대는 정작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가영이는 이미 범수를 그런 부류로 취급하고 있었다.
“아냐. 나도 별로 그렇게 생각 안했는데 막상 그런 일을 겪다 보니 조심하게 되는 거지. 야, 그만하자. 괜히 이것 때문에 너하고 이상해지겠다. 결혼식 하나 보다 들어가자.”
범수는 구세주를 만난 듯 예식장 안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가영이를 데리고 예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예식장 안에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신랑은 주례선생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범수와 가영이는 예식장 뒤편에 서서 신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신부 대기실 문이 열렸다. 범수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까 봤던 갈색머리의 그녀가 나왔다. 범수는 우연치고는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를 바로 지원이가 나오는 바람에 온 신경이 지원이에게로 향했다. 지원이는 안내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아빠가 서 있는 카펫 끝으로 걸어왔다. 범수가 지원이를 보고 손을 흔들자 지원이도 미소를 지으며 범수를 바라봤다. 오늘따라 지원이의 모습은 하늘하늘 거리는 선녀의 모습과 같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모습으로 보였다. 가영이는 그런 범수의 옆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예식이 끝나고 범수는 친구들 사진을 찍을 때야 지원이 곁으로 갈 수 있었다. 가영이는 그런 범수 뒤에 한발 짝 물러서서 있어줬다.
“결혼 축하해. 결혼 축하드립니다.”
범수는 지원이와 그 옆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인사를 했다.
“범수야, 와 줘서 고마워. 내가 말한 친구 범수.”
지원의 신랑은 범수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범수는 멋쩍게 인사를 나누고 친구들이 서 있는 줄 가장자리에 섰다. 그 옆에는 여전히 가영이가 범수를 지키고 있었다. 범수는 지원이를 바라보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지원이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이게 내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행복하게 잘 살아라.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랄게.’
범수는 지원이하고의 거리가 점점 멀게 만 느껴졌다. 범수가 지원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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