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운오리새끼 민 Dec 06. 2018

영원한 혁명가이자 진보의 아이콘 체 게바라

아름다운 거리의 참모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이 말은 현실적인 사람들에게 이상주의적 삶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말하는 문구다.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 그는 아르헨티나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그 자신이 쿠바인이며, 볼리비아인, 페루인, 에콰도르인이라고 할 정도로 혁명이 필요한 곳의 국민이었다. 

그가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대학시절 남아메리카를 모터 사이클로 여행하며 빈부격차와 노동 착취가 심했던 남미 사람들을 보면서부터이다. 

의대 졸업 후 체 게바라는 과테말라에서 의사로서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그는 여성운동가인 일다 가데아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이후 그는 사회주의에 급속도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50년 과테말라에서 진보적 정권이 들어선 이후 개혁을 주도했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 정부군에 의해 정부가 전복되면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무력에 의한 혁명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멕시코로 간 체 게바라는 여기서 카스트로 형제를 알게 되었고 쿠바 혁명에 동참하게 되면서 진정한 혁명전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카스트로의 보좌관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전략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체 게바라의 게릴라전은 승리를 거듭하였으며, 결국 바티스타 정권은 무너지고 1959년 1월 체 게바라는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새 정부의 토지개혁을 담당했으며,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 장관 등을 역임하며, 서방세계에 혁명가이지 정치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차 카스트로와 갈등이 발생하면서 1965년 4월 한 장의 편지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후 그는 아프리카의 콩고 내전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볼리비아로 가서 혁명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너무 허무하였다. 그가 이루고자 했던 혁명은 착취당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국민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볼리비아 농민들의 신고로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젊은 청년들의 가슴에 메아리치고 있다. 체 게바라가 이처럼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섰으며, 의사로서 편안한 삶과 쿠바 혁명 후 권력을 유지하며 안정되게 살 수 있었지만 다른 핍박받는 이들을 위해 다시 전장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와의 만남을 ‘내 생애 가장 위대한 만남’이라고 했다. 아마 체 게바라가 없었다면 쿠바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처음 그랜마호를 타고 쿠바에 상륙했을 때 82명이 17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오히려 피델 카스트로를 위로하며 “우리들은 17명이나 살아남았고, 이로써 바티스타 정권은 끝났다.”라고 하였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이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참모는 위기 상황에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위기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런 대안 없는 긍정적인 사고는 몽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만 체 게바라는 착실히 자신의 원칙과 전략을 지켜가며 혁명을 완수하였다. 

또한 체 게바라는 포로는 죽이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워 정부군 포로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에게 투항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체 게바라는 적은 인원으로 정부군을 상대하려고 하면 어떻게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게릴라 작전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면서 정부군을 와해시키는 심리전을 같이 병행했던 것이다.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 피델 카스트로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초기 두 사람의 마음과 혁명 이후 생각의 변화가 왔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는 쿠바를 시작으로 라틴 아메리카로 혁명을 확산시키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라틴 아메리카에는 소련식 사회주의보다는 중국의 공산화 과정을 모델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의 혁명이 완성된 단계가 아니란 생각에 다른 나라의 혁명에 관여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쿠바의 발전을 위해서는 소련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체 게바라가 소련을 비난하자 소련이 체 게바라의 공직 사퇴를 주장했다. 

결국 체 게바라는 몇몇 지지자들과 함께 쿠바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체 게바라 입장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와의 갈등이 자신과 쿠바의 앞날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갈등을 키우는 것보다는 자신이 떠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자신의 삶에 있어서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판단했던 거 같다. 

참모는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해야 한다. 위기 상황에 강한 참모인 경우 평화기에는 자신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날 필요도 있다. 그것은 리더와 결별이 아닌 아름다운 이별이 되는 것이다. 

PS : 여러분이 조직에서 떠나고 싶거나 떠날 필요성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매거진의 이전글 원나를 초기 유목국가에서 대제국으로 만든 야율초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