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운오리새끼 민 Dec 08. 2018

중국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2인자 주은래(저우언라이)

아름다운 거리의 참모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과 함께 중국공산당을 이끌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를 역임하였고, 청렴과 겸손 그리고 성실함과 온화한 성격 덕에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그가 마오쩌둥의 숙청 과정에서도 살아남아 끝까지 2인자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이런 청렴하고 성실한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저우언라이는 장쑤 성 화이안 출신으로 어려서 어머니와 양어머니를 잃고 나서 숙부에 의해 키워졌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학업을 이어간 그는 중불교육위원회에서 마련한 유학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프랑스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는데, 이 시기 그가 공산주의자로의 삶을 결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 후 국민혁명에 참가하며 본격적인 공산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저우언라이는 1927년 난창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겨우 탈출하여 이곳저곳을 떠돌다 장시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그는 필생의 동지인 마오쩌둥을 만났다. 처음에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보다 위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주장하는 농촌으로부터의 혁명이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중국에서 실현 가능한 혁명임을 깨닫고 마오쩌둥을 지지하면서 그의 밑으로 들어가 일을 했다. 

저우언라이의 이런 판단은 이념적으로 무장한 자신보다 중국 현실에서 잔뼈가 굵으며 현실 정치 감각을 키워온 마오쩌둥의 판단을 존중한 것이었다. 또한 마오쩌둥이 대장정 당시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며,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중국 공산화에 그가 자신보다 더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이념을 토대로 그의 사상과 정책이 혁명에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아우르며 중국 개혁에 힘썼다. 

저우언라이는 국민당과의 협상자로 참여하여 국공합작을 이끌어 냈으며, 장제스가 시안에 갇혀 목숨이 위태로울 때, 그를 구출해 주기도 하였다. 그때 저우언라이가 아니었으면 장제스는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저우언라이는 자신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반대세력의 우두머리인 장제스를 살려주었을까? 

당시 상황은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으며, 동맹국과 연합국 간의 외교 협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를 죽이는 것은 세계대전이 한창인 시기에 중국의 국제 협상 대표를 없애는 것으로 본 것이다. 장제스가 분명 언젠가는 없애야 할 적이기는 하였지만, 그가 미국, 영국 등 세계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지금 현재 중국에서 그를 대신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소련 이외에는 자신들을 지원하는 세력이 없는 상황이었고, 아직 국내적으로도 힘이 미약했으며, 국제적인 지원 없이 일본과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지금은 내부 분열이 아니라 중국에서 외세를 몰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기에 장제스는 아직 적이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명분만 앞세워 실리를 채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우언라이는 철저히 미래를 보면서 현재의 우선순위를 판단했던 것이다. 

일본 패망 후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평화 회담이 열렸으나 협상은 결렬되었다. 사실 저우언라이에게 협상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이 회담 기간 동안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정부에 환멸을 느낀 인사들과 접촉하며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이것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이어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저우언라이는 총리 겸 외교부장을 맡아 국내 행정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을 1971년 유엔 가입과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진출시킨 것과, 1972년 미국과의 수교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뤄 냈던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초기 외교, 행정, 모두를 관장하며 실용적인 노선을 앞세워 중국이 빠른 시간 내에 국제사회에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항상 겸손하며 청렴한 생활을 하였으며, 자만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신망을 얻어 마오쩌둥의 의심을 사기도 했지만, 항상 마오쩌둥을 성실하게 보좌하며 참모로써 끝까지 삶을 살았다. 참모로써 항상 겸손과 청렴을 잃지 않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도 포용하며,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았던 그는 그래서 장제스나 닉슨 등 적대적인 사람들조차도 그를 좋아하게 만들었던 친화력의 대명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참모에게는 적이 없어야 한다. 왜냐면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적을 만들지 않았던 유일한 참모가 아닌가 싶다. 
   
PS : 사람마다 싫은 사람과 좋은 사람이 있다. 나의 경쟁상대가 싫은 사람일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나요?

매거진의 이전글 조직과 리더의 비밀유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