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역사이다. 당시 왕이 직접 나가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였던 것은 한반도에 나라가 세워지고 나서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물론 그전에도 수 없이 많은 외침이 있었지만 그래도 꿋꿋이 항전하며 버텨 냈었다. 과거 청나라보다 세력이 강했던 원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에도 강화도에서 항전하며 버터 냈었지만 당시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치욕을 당해야 했었을까?
병자호란 전에 정묘호란이라고 해서 이미 한차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과 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다. 당시는 형제의 관계를 맺는 선에서 전쟁은 끝이 났었다. 하지만 이후 세력이 강해진 청나라가 조선에 군신의 관계를 요구하면서 싸움의 발단이 시작되었다.
당시 동북아 정세는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국력이 쇠락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조선도 임진왜란의 전란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때였다. 이때 연해주 지방의 여진족이 세력이 강성해 지면서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명나라와 사대 관계를 맺고 있는 조선은 향후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는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리고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배후의 조선을 어느 정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잘 알았던 광해군은 실리외교를 펼치며 강성 해지는 청을 자극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인조에 와서는 이런 주화파의 실리외교는 사라지고 척화파의 친명배금의 원칙이 자리 잡았다. 결국 두 번의 전란을 통해 조선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청의 조선 침략의 목적은 조선을 멸망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명을 멸망시켜 중원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전에 조선이 자신의 뒤를 치지 못하도록 대비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병자호란 때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을 감행했던 것이며,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단 5일 만에 한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왕은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지루한 47일간의 항전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여기서도 주화파와 척화파의 논리 싸움은 계속되었다. 주화파의 대표 최명길과 척화파의 대표 김상헌은 인조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당시 두 진영에서는 나름의 논리를 갖고 인조를 설득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조가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보면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비판하며 등장한 세력이 인조였기에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이때 주화파에서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좀 더 조심스럽게 인조에게 접근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다. 사실 이런 사례는 과거 원나라가 고려를 침략했을 때, 그리고 원나라 쇠퇴기에게도 있었다.
고려 시대 원나라가 고려를 침략했을 때는 송나라가 쇠락해 가고 원나라가 강성해져 갈 때였다. 당시에도 고려 대신들 사이에서 원나라와 화친을 맺어야 한다는 세력과 송나라에 대한 신의 때문에 송나라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척화파가 논쟁을 벌였다. 결국 원나라의 화친 제의를 거절함으로써 강화도로 왕이 피신을 하고 한반도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략했었다.
이후 조선이 세워지는 계기가 됐던 위화도 회군의 역사에서도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명나라를 쳐 요동 땅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권문세족과 명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신진 사대부 세력이 맞서 있었다. 결국 이때는 떠오르는 새로운 나라인 명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앞세운 신진 사대부와 신흥 군부세력이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웠던 것이다.
이 상황을 인조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주화파의 최명길과 그 세력들이 이런 논리로 척화파와 인조를 설득하였면 어떠하였을까? 물론 당시 주화파와 인조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세세한 내용까지 파악되지 않아 알 수는 없다.
그래도 인조가 자신의 시조인 이성계의 실리외교를 한 번쯤 생각해 보았다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물론 이성계의 실리외교라는 것이 참모였던 정도전에 의해서 정리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정은 오로지 이성계의 몫이었으므로 주화파가 자신들의 입장에서 의견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성계의 입장에서 인조를 설득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다.
시간을 병자호란 전으로 돌려 이렇게 구성해 보자. 이조판서 최명길은 임금에게 말했다.
"폐하, 지금 청은 과거 우리가 생각하는 오랑캐가 아닙니다. 또한 명나라는 그 힘이 매우 미약해 이제 저 강성해진 청나라를 대적할 힘이 없사옵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우리가 원병을 보내기 위해 군사를 모은다면 백성들의 원성 또한 자자할뿐더러 얼마 되지 않은 병력으로 청나라의 군대를 대적하기에는 불가하다 생각됩니다. 오히려 그게 빌미가 되어 청이 우리 조선을 친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돼옵니다."
"이판서는 나보고 오랑캐에게 군신의 예를 지키란 말이오? 내가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그대는 정녕 모르고 하는 소리요?"
"......"
최명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자 인조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어찌 아무 말도 못 하오? 내 말이 그리도 유약하게 들리는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으로 있던 최명길이 그제야 말을 했다.
"잠시 태조대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태조대왕께서 요동정벌 반대를 주장하고,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실 때 어떤 마음으로 하셨을까 생각했습니다."
"......"
인조도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인조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자신의 집권세력이 척화 파였지만 과거의 사례를 통해 한 번쯤 더 생각했었다면 삼전도의 굴욕은 없을 수 있다. 또한 인조는 세조나 태종처럼 자신이 주도적으로 반정을 이끌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중종처럼 엉겁결에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닌 어느 정도 지분을 갖고 있었던 만큼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왕이었기에 좀 더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자신이 반정에 참여한 명분인 실리외교를 문제로 광해군을 몰아낸 것에 대한 향후 비판을 감당하기 어려웠기에 인조가 더 척화파의 손을 들어줬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주화파는 세밀한 부분에서 인조를 설득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조에게도 빠져나갈 명분을 만들어 줘야 했다는 것이다. 이미 한차례 정묘호란을 통해 청의 강성함을 파악했고, 당시 정세가 명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라는 점은 집권 전과 후의 판단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했었던 것이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 적이 될 수 있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 있는 게 정치다. 또한 상황에 따라 결정이 달라질 수 있는 것 또한 정치다. 그래서 정치에서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어떤 것이 실리인지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을 참모로써 잊지 말아야 한다.
PS : 북핵 위기로 지금 동북아 정세가 매우 혼란스럽다. 한미 공조와 중국과의 관계 또한 우리나라에게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과 어떤 관계 설정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