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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Feb 07. 2021

경기 유랑 안산 편 5-2(성호 이익)

안산을 거쳐간 굵직한 인물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연이은 전란으로 인하여 조선 후기는 새로운 변곡점을 맞게 되었다. 양반의 숫자는 점점 늘게 되면서 신분제도의 모순이 생기고, 상업이 발달하게 되면서 화폐 유통이 이전과 다르게 활발하게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발맞춘 개혁들은 무뎌져 가고, 조선 전반을 지배하던 성리학은 점차 교조화 되었다. 재산상속을 함에 있어서 여성 대신 장남이 거의 독식하는 구조가 되었고, 심지어 왕실조차도 3년상을 치르는 문제 때문에 몇 차례의 당쟁을 겪기도 하는 등 점차 이런 현상은 심해져만 갔다.


하지만 이런 모순을 해결해보자 일명 실학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연이어 나타나면서 중상론과, 중농론등 저마다의 사상을 가지고,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어 영, 정조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 실학자 중 한 사람이 안산에 터전을 잡고 안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바로 성호 이익 선생님이다. 성호 이익하면 우리가 국사시간에 중농 학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고 있을 것이고, 그의 저서인 성호사설과 사상인 한전론을 달달 외우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편적인 이미지만 남았을 뿐 정작 성호 이익이 어떤 사람인지 알 길이 없었는데, 그의 터전인 안산에 그를 기린 박물관과 묫자리가 있어 한번 찾아가 보기로 한다. 성호 박물관은 단원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물론 이익선생이 남긴 친필과 저서를 전시하고 있어, 성호 이익 종합박물관이라 부를 만하다. 먼저 상설전시실로 들어가 보니 성호사설의 진본은 물론 부친 매산 이하진의 필적인 천 금물 전(보물 1673호), 샛째 형인 옥동 이서가 직접 만들어 연주했던 옥동금 등 여주 이 씨 가문의 가전(家傳) 유물들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원래 성호 이익이 속해있던 여주 이 씨 가문은 대대로 중국 사행을 떠나면서 선진문물에 대한 이해가 충족되어 있었고, 학문이란 쓰임이 있고 배운 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선조들을 말씀을 충실히 따렀던 것이다. 성호선생은 예학이 추구하는 가치와 원리는 한결같더라도 예를 행하는 양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변화하는 시대에 이에 맞는 양식을 행하자는 선진적인 사고방식을 보였었다. 관혼상제의 예식을 대폭 간소 시킨 <<성호 예식>>에서도 이를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저서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었던 성호 이익, 그는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야인 신세였지만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 중심의 역사 서술을 강조한 성호 이익은 제자 안정복으로 하여금 동사강목을 저술하게 했고, 근대 변혁기에 위정척사론으로 이어졌지만 단지 종교로서의 서학과 침략자로서의 외세에 국한되었으며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지식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다. 이후 항일독립운동의 큰 지류가 되기도 했었다.


박물관을 나와 길을 한번 건너면 그의 묘소가 나온다. 원래 이 장소에 이익선생의 묘소뿐만 아니라 이익의 조상과 후손들이 같이 묻혀 있었다. 하지만 반월 공업단지의 조성에 따라 이익의 묘만 남기고 모두 다른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그의 묘소에 참배를 드리고 기나긴 안산 여행을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옴을 느꼈다. 외국인 노동자가 만든 다문화거리에서 출발한 안산 여행은 대부도로 지나 굵직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에서 끝나게 되었다. 안산은 역사는 짧지만 도시가 담고 있는 콘텐츠는 매력이 많다. 아직 중구난방인 느낌이 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이야기들이 하나로 엮어져 문화와 역사의 도시로 거듭나길 바라며 이번 여행을 마무리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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