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운민 Feb 12. 2021

경기 유랑 양주 편 2-1(회암사지 1)

태조 이성계의 또 다른 왕궁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로 급변하는 혼란의 시기,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했던 한 남자가 있었다. 청년시절에는 남쪽에서 올라온 왜구와 북쪽에서 내려오는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내어 국가적 영웅이 되었고, 장년기에는 목숨을 건 결단으로 정권을 잡고, 만인지상의 우두머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추락 없이 상승일로에만 있던 그의 인생에도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쓸쓸한 말년만 남았다.

인생의 동반자였던 신하도 사랑스러운 막내아들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삶을 지탱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바로 종교가 아니었을까? 태조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발길을 자주 돌렸던 장소는 양주에 위치한 회암사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성계의 종교적 스승이자, 친우였던 무학대사가 주석을 하셨고, 회암사에서 입적하고 승탑이 들어서게 되면서 이 사찰에 대한 사랑은 정말 대단했을 거라고 여겨진다.

조선 초기 왕실의 후원을 받아 많은 불사가 이뤄지면서 고려말 조선 전기 최대의 왕실 사찰로서 크게 번영했던 회암사는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2세기 후반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절이 최초로 주목받게 된 시기는 고려 후기 인도의 승려 지공 선사의 뜻에 따라 그의 제자인 나옹선사가 크게 중창했고, 특히 무학대사 시기에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태조 이성계가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 궁실을 짓고 살아 사실상의 행궁 역할을 하였다. 회암사지 박물관에 가면 화려했던 그때 당시의 유물들을 볼 수 있다.

후에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 등 왕실 인물들의 후원을 받아 조선 전기 최대의 왕실 사찰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문정왕후가 죽고, 사림이 본격적으로 득세하게 되면서 조선시대 불어닥친 숭유억불의 기운은 매우 드세었다. 서울 시내에 있던 원각사가 폐사되고, 많은 절들은 불타고, 불상의 머리는 잘려 동네 마당에 뒹구는 신세로 전락했다. 곧이어 닥친 임진왜란의 폐해로 회암사지는 터만 남기고 역사의 뒤꼍 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조선 후기 회암사지 언덕 뒤편 승탑들이 모여있는 좁은 터에 회암사가 재건되어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졌지만 예전의 화려했던 그 영화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잊혀갈 때쯤 1997년부터 2015년까지 12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하여 다시 한번 그 실체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들이 대량 출토되었다. 회암사지는 일반적인 사찰 건축과는 달리 궁궐건축의 건물구조나 방식이 나타나는데 건물 주위에는 회랑이 쳐져 있어 그 엄숙함이 궁궐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또한 왕실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된 용문 기와, 봉황 문기와, 청기와 등의 기와류나 관요에서 제작된 도자기 등 당시 왕실과 불교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들도 앞에 자리한 회암사지 박물관에서 살퍼 볼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경기 유랑 양주 편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