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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Feb 21. 2021

경기 유랑 양주 편 4-2 (온릉)

추억이 묻어있는 장흥유원지

유원지의 붐볐던 흔적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쌀쌀한 겨울바람만 거리 사이로 메몰 차게 분다. 이제 일영유원지는 뒤로 하고, 장흥을 향해 발걸음을 서두른다. 어느새 통일로에서 갈라지는 39번 국도와 합류하고 산자락을 따라 고개가 나온다. 이 고개를 넘기 직전 ‘온릉’이란 표지판이 좌측에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어서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게다가 중앙분리대가 도로 중앙에 뻗어있어, 꽤 먼 거리를 지나 다시 유턴해서 온릉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온릉은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첫째 왕비 단경왕후의 릉으로 얼마 전까지 사람의 출입을 금했다가 2019년에 비로소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을 정도로 베일에 감싸 졌던 미지의 장소였다. 비교적 좁은 입구와 달리 내부는 꽤 넓은 숲길이 펼쳐져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기 좋았다. 최근에 개방된 왕릉이라 그런지 숲은 더욱 빽빽하고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이었다. 길을 따라가다가 좌측 언덕 너머 소박한 왕릉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선왕릉 대부분이 능침을 정자각 위로 올려다 보이는 구조로 만들어졌고, 언덕 위에 있는 봉분 영역을 들어갈 수 없게 금지해서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온릉도 역시 그렇지만 능침의 높이가 낮은 편이라 편안하게 그 모습을 어림잡을 수 있었다. 병풍석과 난간석이 생략되어 있고, 석양과 석호도 1쌍씩 줄였으며, 무인석을 세우지 않은 게 눈에 띈다. 암튼 온릉의 주인공은 여러므로 우여곡절이 많은 듯하다. 조선 왕릉 답사는 인물의 주인공을 잘 살펴봐야 와 닿는 게 많다.

온릉의 주인공인 중종의 첫째 부인 단경왕후는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위된 비운의 왕비다. 보통 왕비가 폐위되는 경우는 잘 없을뿐더러 후궁과의 관계나 임금과의 갈등으로 물러나는 일이 대부분인데 이런 사연이 생긴 연유는 다소 복잡하다. 단경왕후 신 씨의 아버지인 신수근은 연산군 시절 좌의정을 지낼 정도로 탄탄대로를 걸어왔으며 그의 누이동생은 연산군의 부인이자 왕비인 신 씨였다. 그의 딸을 당시 연산군의 동생이었던 진성대군과 혼인을 시켜 고모와 조카의 관계가 왕가에선 동서지간이 되었다.

그러던 도중 연산군의 폭정은 날로 심해졌고, 두 번의 사화를 겪은 신하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드디어 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진성대군을 세우고 왕위에 올리려는 계획을 가진 반정의 주역 박종원이 신수근을 찾아가 계획을 알렸으나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왕으로 세우는 일은 부적절하다”며 반대했다. 중종반정은 성공했고, 신수근은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진성대군은 중종이 되었고, 신수근의 딸 역시 왕비로 즉위했다. 하지만 곧이어 집안이 멸족당하는 상황이 들려왔었고, 공신들은 연이어 왕비를 폐하기를 주청 드렸다.

당시 중종은 20살의 청년으로 공신들에게 휘둘리며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결국 중종은 즉위한 지 일주일 만에 첫 왕비를 폐하고 말았다. 사가로 쫓겨난 단경왕후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독수공방의 신세로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다가 명종 12년 71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일생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한동안 신 씨 가문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던 온릉은 200년이 지난 영조 때 이르러서야 단경이란 시호를 내려주며 왕비로 복권되었다.
이제 개방이 된 만큼 좀 더 많은 사람이 찾아 그녀의 한을 달래줬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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