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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Apr 12. 2021

경기 유랑 양평 편 3-1(여운형과 이항로)

양평을 대표하는 인물의 흔적을 따라

각 고장마다 그 고장을 대표하는 예술가나 문학인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고장 출신의 예술가를 적극 홍보하기도 하고 관련 콘텐츠를 적극 발굴하여 도시의 정체성을 다져나가는 데 큰 역할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럼 양평을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다사다난했던 근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두 인물의 생가가 양평에 남아있다. 


우선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대부 몽양 여운형 선생의 기념관과 생가가 중앙선 신원역 언덕 너머 자리하고 있다. 여운형 선생이 태어난 곳이고, 해방 전후에도 종종 양평에 내려오곤 했었다고 한다.


             




▲ 양평에 위치한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인물인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이 양평에 위치해 있다. 여운형 선생이 서울 계동으로 집을 욺긴 이후에도 짬이 날때마다 양평에 있는 생가를 들렸다고 한다.


몽양 여운형 선생은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나 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반드시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독립될 것을 예측하고 그 이후를 대비해 독립운동을 해오신 분이다. 광복을 맞은 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넘겨받고,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결성하는 등 주권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남, 북 분단은 막을 수 없었고, 그런 상황 속에서 몽양 선생은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해 점점 고착화되는 분단을 멈춰보려 했다. 하지만 1947년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로 추정되는 한지근이라는 청년에게 암살당하면서 그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여운형 선생에게 이런 면모가


             




▲ 여운형 기념관에 있는 여운형 선생의 암살 당시 입었던 옷과 혈흔의 흔적 기념관에서는 여운형 선생의 유족들이 기증한 여러 유품이 있어 그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게 되어있다.


몽양 기념관에는 몽양 선생의 친필, 사용했던 가구, 서거 당시 입었던 혈의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내부를 천천히 둘러다 보면 몽양 선생의 일생은 물론 그의 가치관 등을 엿볼 수 있다. 놀라웠던 사실은 그가 권투, 농구, 멀리뛰기, 수영, 씨름, 야구 등 모든 스포츠를 섭렵한 만능 스포츠맨이 었다는 것이다.


기념관에는 그의 건장한 몸매를 자랑하는 상반신 노출 사진이 있었고, 근육질의 몸을 자랑하고 있었다. 몽양 선생은 민족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건강한 육체가 필수라고 하였으며 왕성한 스포츠 활동으로 건강한 방식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몽양 선생은 <현대 철봉운동법> 같은 운동서도 직접 출판하기도 했었다. 맞다. 모든 일의 기초는 건강이다. 건강이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여행도 사업도 사랑도 힘든 법, 여운형 선생의 건장한 몸을 바라보면서 나태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을 했었다.


             




▲ 여운형선생의 저술서인 <<현대철봉운동법>>에 담긴 그의 모습  여운형 선생은 건강한 신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믿고 체육활동을 적극권장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본인 부터 건장한 몸을 자랑했고, 체육에 관련된 교본을 저술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기념관 2층으로 올라가면 뒤편의 여운형 선생의 생가와 이어진다. 생가는 6.25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새로 복원한 것이다. ㄱ자 사랑채와 ㄴ자 안채가 어우러져 ㅁ자 한옥을 이루고 있는 생가는 비록 새것이지만 내부에 비치되어 있는 가구들은 몽양 선생이 거주하셨던 계동 집에 있던 것을 후손들이 기증한 것이다. 소박한 집 내부에는 여운형 선생이 면도하셨던 모습 그대로 마네킹이 재현되어 있었다. 여운형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에서 그의 이루지 못했던 소망인 민족의 통일의 씨앗이 우리 생엔 이뤄지길 빌어본다. 



이항로 선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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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항로 선생의 초상화 이항로 선생은 위장척사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리타분한 인물이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하지만 그가 키운 굵직한 후학등은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바탕이 되었다.





 


그다음으로 찾아볼 양평의 인물은 위정척사론으로 유명한 이항로 선생의 고택이다. 화서 이항로 선생의 생가는 카페거리로 유명한 서종면에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나오는 남한강의 지류인 벽계천을 바라보고 남향을 한 언덕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살던 한옥과 모신 사당 그리고 기념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선생의 친필과 문 적은 물론 그가 독립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가늠해 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근현대사나 국사 교과서를 통해 접한 그의 첫인상은 답답한 수구세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과 낡은 생각을 지독스럽게 고수하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서양의 선진문물을 반대하고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원흉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시야는 넓어지고 우리나라 말고 다른 나라의 예를 지켜보면서 빠르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이 결코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낀다. 애초에 서양 열강들은 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를 명분으로 삼아 식민 수탈이 목적인 것일 뿐이다.


             




▲ 양평에 있는 이항로 선생의 고택 양평이 나은 또 하나의 굵직한 인물인 위장척사파의 대부격인 이항로 선생의 고택과 기념관이 있다.


최익현, 유인석, 양헌수 등 이름값 높은 후학을 많이 양성했던 이항로 선생의 고택답게 사랑채의 방이 유독 많다. 역사 교과서에서 줄 하나 잘못 적힌 죄로 오랫동안 시대를 읽지 못한 보수주의자로 치부되어 왔던 이항로 선생이지만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조금 편협한 생각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을사늑약에 즈음한 무장 봉기의 대부분을 이항로 선생의 제자들이 주도했고, 한일합방 후에는 그의 많은 후학들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나중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만든 박은식과 김구 선생도 이항로 선생이 만든 화서학파의 일원이었다.



물론 소중화 사상 같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나 자신을 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가치를 고양하고자 했던 이항로 선생의 자주정신은 분명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여운형, 이항로 선생은 교과서에서 주로 접했던 굵직한 인물들이라 그냥 생가와 관련 자료만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함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인물의 흔적이 깃들어 있는 장소에 와보니 그 이면엔 어떤 이야기가 녹아들어 가 있는지, 인물의 새로운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여러분들도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의 인물과 관련된 장소를 한번 찾아가 보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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