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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May 11. 2021

경기 유랑 수원 편 4-2(해우재)

수원의 현재와 미래

수원 답사를 마무리하기에 앞서 수원과 얽힌 인물들과 관련이 있는 장소가 몇 군데가 있어 그 발자취를 따라 가보려고 한다. 정조 이후로 경기도를 대표하는 대도시로 성장한 수원인 만큼 많은 인물들이 수원을 거쳐 갔겠지만 이번에 소개할 인물들과 그들과 관련된 흔적들은 일부러 시간을 만들어 찾아갈 볼 만하다. 먼저 소개할 사람은 일제강점기 시절 화가로, 그림은 물론 그녀의 행적도 세간의 화제가 됐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1~5회까지 입선했으며, 1921년 경성일보 건물 안에서 한국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던 인물. 그리고 글을 썼던 소설가이기도 했던 나혜석이다. 수원 출신이었던 만큼 수원에는 그를 기릴 수 있는 거리가 남아있다. 행궁동의 나혜석 거리에는 그의 생가터로 추정되는 장소에 비석이 남아있고, 수원 아이파크 미술관에는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 등 몇 점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어 있다.



불합리한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냈던 나혜석   


             




▲ 수원 나혜석 거리의 나혜석 동상 수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혜석 화가는 우리나라 근대를 대표하는 여성화가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근대사 만큼 그녀의 일생도 다사다난하게 흘러갔었다.



하지만 나혜석 화가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인계동에 그녀를 기려 만든 보행자 거리인 '나혜석 거리'를 방문해 보길 추천드린다. 효원공원에서 도로를 건너면 제법 넓은 나혜석 거리가 바로 보인다. 주변은 도회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상권이라 다른 장소랑 차별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이 아쉬웠지만, 바닥에 검은 돌로 그녀의 일대기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한복 차림을 한 나혜석 화가가 다소곳한 차림으로 앉아 있다. 


나혜석 화가의 생에는 우리 근현대사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사다난했다. 나혜석은 나 참판댁 또는 나 부잣집이라고 불리는 경기도 수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집안 자체가 부잣집이었고,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는 등 부족함이 없는 삶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보다 어린 첩을 두고 어머니와 자신을 차별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남성 중심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혜석은 그 이후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명절이 여자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했고, 결혼을 여성을 억압하고 옥죄는 족쇄라고 판단했다. 당시 사회상으로서는 정말 파격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일본 외무성 외교관이었던 남편 김우영을 따라 1년 8개월에 걸쳐 유럽, 미주 등을 여행했다.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일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편과의 세계일주 중 파리에서 최린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 후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손가락질 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세 아이를 빼앗기고 빈털터리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그림과 세상에 대한 분노였다. 그녀는 '이혼 고백서'를 통해 세간을 한 번 더 들썩이게 했다. 그러나 그녀가 목소리를 낼수록 세상 사람들은 나혜석에게서 더욱 더 등을 돌렸다. 사생활을 이유로 미술전람회 입상을 박탈당했으며,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문을 연 미술강습소 역시 철저히 외면당했다. 말년에는 불교에 의탁해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서 한동안 생활하다가 결국 거처없이 떠돌게 된다. 그는 결국 찾아오는 이 없는 병원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사회의 불합리한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걸었던 신여성 나혜석, 불꽃 같았던 도전적인 삶은 현대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나혜석 거리의 반대편에는 한복을 단정하게 입은 동상과 대비되는, 신여성의 복장을 한 나혜석 상의 모습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녀의 일생과 지나간 발자취를 돌아보며 나 자신도 주체적인 삶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다.



거대한 변기를 닮은 건축물, 그 정체가 


             




▲ 해우재 내부의 전시품  해우재 내부에는 비데는 물론 동서양의 다양한 변기들과 수세식 변기의 원리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수원 답사의 마지막 장소는 '화장실'에 관한 곳이다. 한동안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었던 화장실 문화 전시관인 해우재에 찾아가려고 한다. 영동고속도로 북수원 ic와 머지않은 장소에 있어 답사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에 잠깐 들를 만 하다. 전 수원시장 심재덕씨가 퇴임하고 변기 모양으로 만든 집을 기초로 꾸민 박물관인 해우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가 배설이다. 그런 행위가 주로 이루어지는 공중화장실은 오랫동안 불결한 장소로 인식되어 왔었다. 특히 더러운 화장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면 좀처럼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불쾌해지기도 한다.



평소 환경과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심재덕씨는 수원시장 시절, 화장실 환경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1996년 수원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중 화장실을 가진 도시로 만들 것을 선언, 본격적인 '화장실 문화운동'에 매진했다. 그리고 전국 최초로 화장실 전담부서를 신설하여 공중 화장실 환경개선을 위한 행정을 펼쳤다. 


             




▲ 변기를 본떠 만들었다는 고 심재덕 수원시장의 해우재 고 심재덕 시장은 별명이 "미스터 토일렛"일 정도로, 화장실 문화 발전에 상당히 애를 쓰신 분으로 유명했다. 시장에서 물러난 후 사택을 변기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 지금은 화장실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보여주기 식 행위'라는 지적을 받거나, 예산낭비의 사례로 지목되었고, 심지어 인터넷을 중심으로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전국의 화장실이 대폭 개선이 되었다.  화장실이 더 이상 배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색과 휴식, 전시와 만남 등 에너지 재충전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심재덕 시장은 화장실만큼은 진심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세계화장실협회(WTA)를 창립하고 개발도상국 공중화장실을 보급하기 위한 사업인 '사랑의 화장실 짓기 운동'을 작고하기 전까지 이어갔다. 



주차장에서 해우재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화장실의 역사와 문화 변천 과정을 한눈에 보여주는 화장실 문화 공원을 먼저 거쳐야 한다. 우리나라의 최초 공중화장실인 왕궁리 유적 화장실부터 유럽의 화장실 모형, 요강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각종 화장실의 모습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도 흔치 않다. 더럽게만 여겨졌던 화장실과 점점 친숙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얼핏 보면 변기 외형을 하고 있는 특이한 건물이 눈에 띄는데 그 건물이 현재 화장실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해우재 건물이다.'화장실의 역사'와 '화장실의 과학'이라는 두 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는데 화장실의 역사와 수세식 변기의 발전 과정 등 평소에 친숙하고 가까운 이야기지만 알기 힘들었던 정보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다.


             




▲ 화장실 문화공원의 전경 해우재에 진입하기 앞서 우리나라는 물론 동,서양의 다양한 화장실 문화를 알 수 있는 화장실 문화공원이 있다.


해우재는 특이한 외형뿐만 아니라 집안의 한가운데 화장실을 두어 생활의 중심으로 이끌어 냈다는 점이 독특하다. 심재덕씨는 외갓집 뒷간에서 출생해서 '개똥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화장실에 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화장실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무언가에 탐닉한다는 게 결코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광교신도시에서 시작하여 수원의 상징인 수원화성 답사를 거쳐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수원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정말 풍부하고 다양하구나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다. 앞으로도 가야 할 도시가 상당히 많이 남았는데 그 도시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다음 도시의 이야기로 서둘러 떠나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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