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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Sep 30. 2020

경기 유랑 파주 편 2-2 (황희 정승)

임진강 따라 역사를 찾아가다.

올해 유난히 길었던 장마와 강력했던 태풍의 흔적은 오간데 없고 청명한 가을 하늘과 부드러운 햇살이 임진강변을 변함없이 비추고 있다. 혹여나 피해가 없을까 주위의 논밭의 작물을 두리번거린다. 다행히 벼는 노랗게 익어 수확을 앞두고 있고, 포도나무의 포도들도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올해는 모두에게 유난히 힘든 해지만 잘 극복해서 모두 웃고 다녔으면 좋겠다. 어느새 차는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곳인 반구정에 도착했다.

보통 유명한 관광지나 명소에 가면 주위의 경치를 ”시각“으로 감상하기 바쁜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자마자 강력한 굽는 냄새가 나의 ”후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뭔가 고소하면서도 약간 비릿한 냄새가 짚불 연기를 타고 나의 코를 타고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 장어구이 냄새다. 특히 장어구이를 좋아하시는 분은 반구정을 들었을 때 바로 장어구이집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반구정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동명의 장어집 반구정 나루터가 먼저 뜰 정도로 옆의 장어구이집의 명성은 대단하다. 그 덕분에 주위가 장어집 마을이 되었다.

장어 종류는 크게 4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제일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장어가 민물장어(우나기)다. 뱀장어라고 하기도 하는데 간장을 해서 구워 먹기도 하고, 초밥이나 덮밥을 해서 먹기도 한다. 고창의 풍천장어와 강진의 목리천 장어가 특히 유명하기도 하고, 임진강의 대부분 장어집이 민물장어 집이다. 다음으로는 바닷장어라고 불리기도 하는 붕장어(붕장어)는 횟집에서 회로 많이 먹기도 하고 구워먹기도 한다. 그리고 여수지역에서 흔하게 보이는 갯장어(하모)는 손질하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기도 하고, 구우면 꼼지락 되는 곰장어(먹장어) 정도를 마지막으로 들 수 있겠다.

갈 길이 멀기도 할 뿐만 아니라, 반구정 나루터의 장어구이는 만만치 않은 가격(1인분 5만 원)을 자랑하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표를 구입해 황희 정승 유적지로 조성되어있는 반구정 경내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규모가 꽤 있어서, 기념관과 영정을 모신 영당과 사당까지 정갈하게 갖춰졌다. 우리가 흔히 아는 황희의 이미지는 청백리와 죽기 직전까지 세종의 재상 노릇을 톡톡히 해내며 너그러운 성격으로 중신들 사이를 잘 조절했다고 알고 있다. 87세까지 벼슬살이를 하다가 여기 반구정에서 3년을 머물고 별세(別世)하셨는데 그 당시에 90세면 정말 오랜 세월까지 장수하셨다고 본다. 지금도 90세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반구정에 올라 임진강의 경치를 보니 정말 경치가 예술이다. 건너편 민통선의 장단면도 잘 보이고 유구히 흐르는 강물도 장관이었지만, 내가 예상했던 청백리의 이미지랑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여기의 건물들이 비록 수십 년 전에 다시 복원했고, 후손들이 개축했지만 터가 좋고, 부지가 잘 닦여져 있었으며, 그의 행적을 기록한 사당과 비석의 위세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분명 청백리였다면 그의 후손들에게 유언이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그의 행적을 더욱 추적해 보기 위해 황희 정승이 묻혀 있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황희 정승의 묘는 반구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청백리의 묘라 초라한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양지바른 곳에 소박하게 모셔진 줄 알았으나 묘 입구에 사당이 있었고 봉분은 작은 동산을 다져서 만든 언덕 꼭대기 위에 문인석, 무인석 석상과 함께 우러러보고 있던 것이다. 신하의 묘보다는 왕릉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었다.

참배로 를 따라 묘역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 그의 위세를 실감하게 되었다. 무덤에는 병풍석이 둘러져 있으며 묘역 뒤에 펼쳐진 기다란 담장 크게 자란 나무들이 더욱더 위압감을 가져다주었다. 병풍석은 조선 7대 세조(수양대군) 조차도 유언에 금지해 왕조차도 함부로 두르지 못했던 것이다.

황희 정승의 청백리 일화가 후에 꾸며진 야사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다가온다. 물론 인간의 물욕이라는 걸 억제한다고 해서 정치가 잘 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 시절의 인물들을 현재로 잣대로 함부로 평가해서도 위험한 일이고, 황희 정승의 여러 가지 공과 과가 있을 터인데, 세종대왕이 만약 그가 능력이 부족했다면 그의 치세 내내 중하게 쓰지도 않을지도 모른다.

역사의 현장에 서서 역사의 흔적을 되짚어 보니 잘 알지 못했던 인물들의 새로운 면모를 배워간다. 파주 임진강변의 역사의 흔적을 찾아 다음 장소로 바쁜 걸음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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