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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Oct 01. 2020

경기 유랑 파주 편 2-3 (율곡 이이)

임진강 따라 역사를 찾아가다

강길을 따라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내륙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간다. 강폭은 점점 좁아지고, 유속은 빨라지면서 그동안 다녀왔던 역사의 현장을 강물로 흘러 보내고 새로운 명소와 그 장소에 얽힌 인물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파주는 한양(서울)에서 멀지 않은 거리와 개성과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묻어있다.

다음 살펴볼 인물은 한국인이면 모를 수가 없는 지폐 5000원권의 인물인 율곡 이이의 흔적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여기를 가보기 전까지 오죽헌의 이미지가 강렬해서 율곡 이이는 파주 사람이 아니라 강릉 사람인 줄 알았지만 강릉은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이며 이이는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가 고향이다. 아호인 율곡도 율곡리에서 유래되었고, 태어난 곳은 오죽헌이지만 그가 살아온 곳과 묘가 자리한 장소가 전부 파주에 있다.

방금 파평면을 스치듯 지나갔었는데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 내내 영향력을 행사했던 파평 윤 씨의 본거지가 맞다. 파주도 거기서 유래되었는데 이후 자세히 한번 얘기해보기로 하고, 먼저 율곡 이이가 즐겨 찾았으며 학문을 논하기도 했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화석정으로 먼저 떠나본다. 가는 길은 차가 겨우 한 대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주차장에 차가 거의 꽉 들어차 있었다. 율곡 이이의 명성이 과연 허언이 아니구나 생각하면서 화석정으로 천천히 길을 들어서니 임진강이 굽 어치는 높은 지점에 정자가 들어서 있고 양옆의 나무는 화석정의 깊은 연륜을 전해주고 있다. 이 정자는 율곡 이이 이전에 원래 고려말 길재가 터를 잡고 살던 곳으로, 이율곡의 6대 조인 이명신이 물려받아 정자를 지은 후 주위에 온갖 괴석과 화초를 심고서 화석정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이는 8세에 화석정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늦으니
시인의 정회 다할 길 없어라.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과 연하여 푸른데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에 붉는구나.
산은 외로운 둥근달을 뱉고 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었도다.
변방의 저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아득한 울음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끊어져버리네.

불과 8살 때 이런 서정성을 보이다니......... 산은 외로운 둥근달을 뱉는다는 구절에서 정말 감탄을 안 할 수 없었다. 이이는 대학자이기 이전에 감수성이 엄청 풍부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죽음에 충격을 먹고 상을 치르고 절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그 당시 특히 유학을 중시하고 불교를 천대 시한 조선시대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율곡 이이의 인간적인 면모를 조금 알아가는 것 같다.

화석정은 야사로 선조와 얽힌 재미있는 일화도 녹여있다. 우리가 항상 역사를 보며 아쉬워하는 대목이 이이의 ‘십만 양병설’설인데 미리 임진왜란을 예견했던 이이가 선조가 이곳으로 피난길을 오를걸 예견하고 생전에 화석정에서 기름칠을 항시 했었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이곳으로 피난을 오자 화석정에 불을 질러 밤중에 안전하게 임진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녹아있는 화석정에서 임진강 절벽의 빼어난 절경까지 더 해지니 하루 종일 정자에 앉아 세월아 네월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율곡 이이 선생의 재촉을 받고 그가 묻힌 묘소와 서원으로 아쉬움만 남기고 길을 떠났다.

그의 묫자리는 화석정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율곡 이이의 명성 때문인지 높으신 분들은 그가 묻어계신 묫자리와 서원을 성역화 작업이라는 미명(美名)하에 공원처럼 잔디밭과 화려한 동상 연못까지 만들었고, 입구의 표지판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돚자리를 끌고 와선 아이들과 킥보드를 타고,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일반 유원지인지 공원인지 유적지인가 전혀 분간을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물론 현충원이나 장례식장처럼 엄숙한 분위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랑하는 역사적 인물의 흔적이 남겨져 있는 장소라면 최소한의 존중이라도 보여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소음을 막아주고 있어 담장 하나 사이로 다른 느낌의 공간이 펼쳐졌다. 율곡 이이가 맨 위에 모셔져 있었고, 신사임당과 이원수(이이의 아버지)가 자리 잡고 밑에는 그의 후손들이 주위에 안장되어 있다. 꽤 많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지만 산속의 고요함이 맘에 든다. 절을 한번 올리고는 그의 위폐가 모셔진 자운서원으로 이동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70년에 다시 복원했지만 주변의 터와 나무들이 서원의 유구한 역사를 전해주어 가벼운 마음으로 한 바퀴 돌았다.

기회가 있을 때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얼이 살아있는 오죽헌에도 방문해 그들을 한번 자세하게 다뤄보기로 하고, 임진강변의 여행은 여기서 마무리하고자 한다. 파주는 알아 갈수록 인물도 많고 그에 얽힌 이야기도 있는 역사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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