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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Sep 28. 2020

경기 유랑 파주 편 2-1(조선 인조)

임진강 따라 역사를 찾아가다

현재 파주는 북쪽으로 길이 끊어져 있어 위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지만 과거엔 사신들이 중국으로 오가는 주요 길목에 있었다. 흔히 사행로(使行路) 또는 연행로(燕行路)라 부르는 길로 한양 돈의문(서대문)을 거쳐 홍제원 고양 파주 장단으로 이어지고 의주로 통해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지점이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사신이 머무는 공간과 숙식 장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파주에 흔적을 남긴 인물들의 발자취가 한 둘이 아니다. 위치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아는 수많은 인물들이 파주에 살기도 했고, 죽어서도 유택(幽宅)을 파주로 마련해 지금도 수많은 여행객이나 답사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임진강의 아름다운 풍경 주위로 그 역사적 흔적들이 분포되어 있어서 역사적 향기를 품에 안고 찾아가 보기로 했다.

파주의 입지상 수도 한양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조선왕릉 군이 분포되어 있는데, 조선의 국법인 경국대전에 따라 ‘능역은 도성에서 10리(약 4km) 이상, 100리(약 40km) 이하의 구역에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일부 예외는 있다. 영월에 위치한 단종의 장릉) 얼마 전까지 비공개로 문을 굳게 닫았다가 최근에 개방된 남한산성의 주인공, 조선 16대 임금 인조와 인열왕후가 묻혀 있는 파주 장릉으로 먼저 가게 되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 시대에 따라서 사회상을 반영해서 평가가 뒤바뀌는 경우가 잦은데 광해군 같은 경우 궁궐의 무리한 중건, 이복동생(영창대군)과 친형(임해군)을 죽인 오명에서 벗어나 대동법, 중립외교 등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는데 반해, 인조의 경우 중립외교를 파기해 두 번의 호란(정묘, 병자)을 일으켜서 굴욕을 당했다는 점, 소현세자를 핍박해 원인 모를 죽음의 원인을 제공함으로써 조선의 근대화의 길을 영영 놓쳤다는 의견들이 부각이 돼  인조는 암군(暗君)의 대명사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현재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출입이 통제된 상태로 장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비밀의 문을 열자마자 파주시민을 비롯한 많은 관광객들이 한숨 쉬어가는 쉼터의 역할, 역사적 교훈을 배워가는 현장의 장소로 사랑을 받고 있다. 주위에 조그만 공단이 있고, 어수선한 분위기라 큰 기대는 안 했지만,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나의 눈으로 봐도 명당이라고 느껴질 만큼 산이 왕릉 주위를 감싸고, 몇 백 년 동안 보존된 숲 속의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있었다. 멀리서나마 능역을 올려다보면서 무덤에 묻힌 인조에 대해 생각해본다. 지금 현재는 좋은 평가보단 안 좋은 평가가 우세하고, 특히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를 겪은 일은 본인뿐만 아니라 역사를 배우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평생 치욕으로 남았으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세월이 지나면 긍정적인 면도 조금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이 벌여놓았던 수많은 공사들을 그가 즉위하자마자 중지시키고, 청나라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에 간섭을 최대한 저지한 노력들이 곳곳에서 보이고, 이원익, 최명길 같은 능력 있는 인사들을 중용하는 등 재평가받을 여지도 많다. 현재는 능을 참배하러 온 방문객들 조차도 능을 바라보며 혀를 차는 소리도 심지어 험담을 하는 목소리도 들리지만 그것도 하나의 역사니까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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