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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Oct 28. 2020

경기 고양 편 2-4 (벽제갈비, 공양왕릉)

고양의 원류(源流)

반나절 넘게 고양동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배는 때를 맞춰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잠시 쉬어가자는 신호가 온몸에 퍼지기 시작한다. 고양동 초입에 있는 벽제지역은 예전부터 동네를 지나가는 교외선 초입에 있어 장흥, 송추 유원지를 놀러 가는 가족여행객들이 중간에 식당에 들러 고기를 구워먹는 일명 가든 식당이 많기 때문에 그중에 원조격인 벽제갈비에 들러 그동안 쌓인 피로를 고깃기름에 녹여서 없애기로 했다.

동명의 강남에 있는 봉피양 벽제갈비와는 다른 식당이지만 창업이 1968년으로 오래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가든식당으로 새로운 외식문화를 창조한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식당이라 볼 수 있는데, 과연 그 명성에 맞게 1만 평의 넓은 대지위에 본관, 별관, 야외 연회석등 다양한 건물들이 크게 늘어서 있었고, 식사 후 메타세쿼이아 숲에서 산책을 즐기면서 사색의 시간을 가지고 족구장에서 볼을 차며 가족, 친구들과 즐겁게 보내는 등 식당이 아니라 공원의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1962년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진행하면서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 산업화 시대로 바뀌어가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대거 상경하게 되고, 도시의 하천은 매워지면서 차들이 다니는 도로로 바뀌고, 주변이 공장과 집들로 가득 차 그때부터 사람들은 전원에 가서 맑은 물과 공기를 쐬는 여가문화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교외선변의 장흥, 일영, 송추는 그런 면에서 알맞은 장소였고, 널찍한 공간에서 여유롭게 고기를 구워먹는 서양의 정원에서 이름을 따온 가든식당 문화가 퍼지기 시작했다.

오랬만에 가든식당에 와서 한우 등심 2인분을 구워먹으니 지갑은 텅텅 비었지만 예전의 추억을 되짚어 볼 수 있어 마음은 든든해졌다. 요즘은 교외에서도 새련된 레스토랑이 많이 생겨나고, 음식문화가 다양해져서 가든식당은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지만, 을지로가 뉴트로 붐을 타고 힙한 문화공간으로 탈 바꿈 한 것처럼 가든식당만의 방식은 잘 유지하고, 새로운 세대에 뭔가 어필할 수 있는 시도를 해보았으면 좋겠다.

마지막 왕의 결말은 사라진 왕조처럼 끝이 희미하다. 역사의 무대에서 어느새 사라져 우리는 새로운 창업자들의 행적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가 망국 이후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디서 끝을 맺게 되었는지,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고려의 마지막 공양왕은 왕릉이 두 장소에 있다고 전해지는데 하나는 강원도 삼척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지금 가고 있는 경기도 고양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34대 왕이며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원래 왕가의 먼 친척으로 애초에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지만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상태에서 우왕, 창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위한 징검다리로 그를 왕위에 올린 것이었다. 허수아비 상태로 몇 년간 왕위에 조용히 머물다가 왕조를 넘겨줄 수 있지만, 공양왕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몽주를 통해서 정도전 등 이성계의 주요 인사들을 견제하거나 귀양 보내고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큰 성과를 이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이 실패하고 결국 고려는 500여 년의 역사만 남긴 채 막을 내렸다.

같은 망국의 군주라도 신라의 경순왕이 사심관으로 임명돼 부귀영화를 누리다 천수를 마친 것에 반해 공양왕의 마지막은 참 안타까웠다. 원주로 고성으로 삼척으로 강원도 여기저기를 귀양 다니다가 건국 후 2년 뒤인 1394년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태종 때 삼척에서 고양으로 릉이 욺 겨져 능참봉 까지 두어 관리를 했다고 하니 조금 아이러니한 감정이 들었다.

공양왕의 흔적들은 여러 설화가 민간에서 전해지는데 조선 건국 후 이성계의 후환이 두려운 공양왕은 지금의 동네까지 내려와 절에서 가져다주는 밥으로 식사를 했다고 해서 밥 식자에 절 사자가 붙은 식사(食寺) 동의 유래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고, 왕릉이 위치한 골짜기를 왕릉골이라고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왕릉이라고 하기엔 규모도 작고 바로 뒤편엔 공양왕의 외손들인 정 씨, 신 씨의 무덤도 함께 있어 옹색한 느낌이 들지만 높고 기다란 소나무 숲들만이 공양왕릉의 품격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고양동의 역사여행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시 배낭을 꾸리고 새로운 명소를 찾아가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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