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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Oct 31. 2020

경기 유랑 고양 편 3-1 (서삼릉 태실 1)

조선왕실의 명당

청명한 하늘이 높게 떠있고, 시원한 바람이 나의 뺨을 스쳐 지나가며, 길거리엔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빨갛게 노랗게 옷을 갈아입으면서 사방을 아름답게 물든 날, 평소에 내가 역사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주변 지인이 그동안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서삼릉 태실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예매를 하면 하루 3회 해설자 동행으로 탐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얘기해 주었다. 마침 나는 고양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탐방 중이었고, 좋은 기회라 생각되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하루 3회 20명 한정이라 특히 주말에는 예매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 빈자리가 없었고, 평일에는 내가 본업이 있는 사람이라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비밀의 구역에 대한 환상을 늘 가지고 있는 터라 어떻게든 시간을 내 보고 싶었기에 핑계를 내어 평일 하루를 통째로 월차를 내서 태실도 보고, 근처의 왕릉 탐방도 덤으로 하는 여행을 떠나보기로 한다.

편견일지는 모르지만 고양시내에는 유난히 은행나무가 많아 색 노랑 잎이 진하게 물들어 단풍잎과는 다른 뭔가 차분한 느낌이 도시 여기저기서 감돌고 있다. 주말여행과는 달리 평일 한낮에 여행을 떠나는 일은 더 한적한 느낌을 주고, 뭔가 다른 세상에 떨어진 듯 하지만 한편으론 죄를 짓지 않았는데 떨떠름한 기분도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그런 기우도 잠시일 뿐 차는 어느덧 도심지를 벗어나 산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한다.

농협대학교 담장을 따라 산길을 오르니 어느덧 속세의 흔적은 사라지고, 여러 잡념들로 차 있던 나의 머릿속이 시원한 바람과 함께 비워지면서 지금 현재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아뿔싸! 느긋하게 움직이던 나의 시계가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서삼릉 태실 예약시간이 10분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서둘러 서삼릉 입구로 도착했다. 매표소 입구로 가서 서삼릉 태실을 예약한 사람이라고 얘기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어 여기가 아닌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소위 멘틀 붕괴라 불리는 상태를 겪고 말았다.

물론 서삼릉의 입구는 여기가 맞지만 서삼릉의 태실은 여기서 무려 5km가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서삼릉에 가면 바로 태실을 볼 수 있다는 나의 안일한 생각으로 인해 이번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태릉으로 가려면 내비게이션에 서삼능 보리밥집을 치고 담장을 따라 돌아서 북쪽 끝으로 가다 보면 입구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차를 몰고 그리로 향했다. 과연 보리밥집에 도착해서 위로 조금 올라가니 근래에 단장된 서삼릉 태실 입구가 나와있고, 닫혔던 문이 시간에 맞춰 조금 열려있었다. 경비분에게 서둘러 나의 신원을 밝히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가니 해설사 분은 자기소개를 하고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울창한 산림 속에서 해설사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서삼릉의 북쪽 끝 부분에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태실과 왕자 공주 묘들 후궁들의 묘를 구역별로 한데 모아서 지금까지 전해져 왔는데, 우선 개성 없는 비석들이 한자리에 있는 태실 구역에 도착하니 왜 이런 비석들이 한꺼번에 모아져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보다 우선 태실에 대해 알아보자면 왕실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버리지 않고, 태 항아리에 보관하며 전국 각지의 명당에 보관하는데, 이러한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된 시설을 태실이라 부른다.

하지만 공동묘지의 비석처럼 개성도 없는 비석들만 한데 모여있는 서삼릉 태실을 보며 어쩌다가 이렇게 된 사연에 대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해설사에게 속사포 같은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해설자님 왜 태실이 하필 서삼릉에 한데 모이게 된 거죠? 비석들도 무슨 공동묘지처럼 멋도 없이 서 있고요?” “음 이런 게 바로 일제의 만행을 보여주는 겁니다. 일제가 1929년 우리 민족의 정기를 꺾기 위해서 전국에 산재한 태실 54기를 한데 모았는데요. 여기 보시면 이름이 새겨져 있고 뒤가 파여있죠? 여기에 일본 소화(쇼와) 연호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걸 광복 후 판 건데요. 이걸 끝까지 남겼다면 일제의 만행의 증거가 될 텐데 아쉽습니다.” 과연 태실을 한 바퀴 돌면서 파여있는 흔적을 보고, 공동묘지 같은 광경을 직접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고, 앞으로 문화재를 더더욱 아끼는 마음도 가져야겠다는 다짐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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