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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Oct 31. 2020

경기 유랑 고양 편 3-2(서삼릉 태실 2)

조선왕실의 명당

서삼릉 북쪽 구역에는 태실뿐만 아니라 왕자 공주 묘, 후궁 묘 등이 모여있는데, 태실에서 서삼릉 방향을 바라보니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풍경이 아닌 컴퓨터 배경화면에서 볼 만한 넓고 푸른 초원이 펼쳐졌다. 알고 보니 원래 서삼릉의 넓이가 120만 평이 넘었는데, 농협 소속의 목장부지로 넘어가 9만 평만 남고, 가운데 부분은 절단되어 북쪽 구역이 비공개로 남았던 이유가 되었다. 일제가 아니라 문화재의 인식이 부족했던 우리로 인해 그런 비극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아픔들을 뒤로하고, 어느새 앙증맞은 담장 뒤로 조그마한 분묘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왕자, 왕묘들의 묘가 나타났다. 14명의 왕자와 8명의 왕녀들 총 22분이 한 장소에 모셔져 있는데, 원래는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35년부터 1939년까지 현재의 자리에 모두 욺 겨졌다고 한다. 묘소는 모두 하나의 담장 안에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 앞에는 문인석과 상석, 장명 등이 세워져 있지만, 각각의 무덤 앞에는 묘지석이 따로 있어서 어느 분의 무덤인지를 알 수 있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왕자와 왕녀들은 성인이 되지 못하고 이름도 짓기 전 어린 나이에 명을 달리해 비석에는 이름 대신 왕자, 대군, 원자, 왕녀로만 새겨져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죽어서나마 이렇게 모여있으니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역시나 뒤편에는 일본의 연호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고, 한국 전쟁 당시 손상을 입은 비석들도 종종 눈에 띄어 역사의 상흔을 많이 겪은 비극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왕자, 왕녀의 구역을 지나면 후궁 묘역으로 이어지는데, 후궁 묘는 숙의 묘역과 빈, 귀인 묘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여기서 잠깐 왕비와 후궁들의 계급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우선 정실 왕후인 비가 있을 것이고, 그다음으론 정 1품인 빈이 있는데 후궁은 물론 세자빈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 밑으론 귀인,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숙원으로 나누어져 있고, 숙의 묘역으로 가면 숙의뿐만 아니라 숙원, 소의 계급의 후궁들과 고종의 첫째 아들인 완화 군의 묘도 함께 볼 수 있다.

조금 옆으로 가면 빈, 귀인 묘역이 위치해 있고, 수많은 무덤들과 함께 각각의 사연들도 함께 헤아려 본다. 겉으로는 궁안의 생활이 무척 화려하고, 부족할 게 없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암투를 버텨내야 하고, 수십 년의 독수공방 생활도 감내해야 하는 등 수많은 무덤의 주인에 대한 일거수들을 일일이 알 순 없다. 죽어서 나마 본의 아니게 여기로 욺 겨져 그 자리는 이미 재개발되어 흔적은 온 데 간데없고, 묘역은 좁아졌지만 비슷한 사연끼리의 여인들끼리 모여 서로 하소연하며 그 한들이 조금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마지막으로 언덕길을 조금 오르다 보면 여태까지 봤던 수많은 무덤군들과 다르게 홀로 우뚝 서서 문인석과 무인석을 모두 갖춘 왕릉급의 거대한 봉분이 눈앞에 보인다. 조선 성종의 폐비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 씨의 회묘가 바로 이 장소이다. 폐비 윤 씨는 원래 후궁으로 들어왔다가 원자를 낳고 왕비로 책봉되었지만 투기로 인해 왕의 얼굴에 상처를 내면서 폐위되었고 몇 년 뒤에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이 폐비 윤 씨의 자식임을 알게 되었고, 그를 왕후로 추촌 해 그가 묻힌 묘를 회릉이라 지었고, 시호를 제헌왕후로 높였다.

하지만 연산군은 곧 폐위되었고, 회릉이라 지었던 릉이 다시 회묘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능제의 형식은 그대로 남았고, 회릉이 있던 동네는 회기동이라 전해져 지금에 내려온다고 하니, 막걸리에 파전만 먹으러 다녔던 장소라 별 생각이 없었는데 유래를 자세히 알게 되어 새삼스레 동네가 달리 보이는 듯했다. 회묘는 1969년 재개발의 여파로 회기동에서 지금의 장소로 이전한 것이다. 다른 조선왕릉들 대부분이 언덕 밑에서 멀리 올려다봐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반해 회묘는 바로 앞에서 무덤을 한 바퀴 돌며 무덤 뒤의 석상까지 자세히 관찰해 볼 수 있어 정말 좋았다.

1시간여의 서삼릉 태실을 돌아보니 비록 일제 이후 원래의 장소에서 이전해온 왕가의 무덤들이지만 지금부터 우리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잘 가꾸어 준다면 하나의 역사로 잘 녹아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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