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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Nov 03. 2020

경기 유랑 고양 편 3-5 (흥국사)

조선왕실의 명당

하루 종일 무덤만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어느 순간 그 무덤이 그 무덤 같아 보이고, 매너리즘에 빠져 슬슬 지겨움 느낄 때쯤 이대로 일정을 끝내기엔 조금 아쉬워 조선 왕실과 연관이 있고,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북한산 맞은편 노고산 자락에 있는 고양 흥국사로 찾아간다. 북한산을 등반하는 사람들 한테 인기 많은 코스 중 하나인 북한산성 초입에 있지만 그곳에 명찰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북한산은 어디에서 출발하거나 어느 동네에서 보아도 그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북한산을 가장 아름답게 아니 노골적으로 속을 훤히 들어다 볼 수 있는 길은 바로 여기 북한산성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서울 쪽에서 바라보는 보현봉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빌딩 숲과 차들이 내뿜는 매연에 가로막혀 무언가 속 시원하게 들어다 보는 맛이 없고, 주 봉우리도 북악과 보현봉에 가려 무언가 싸매고 있는 느낌이라 약간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서울 은평을 지나 차를 틀어 북한산 계곡을 따라 은행나무길로 들어서면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인수봉과 백운대의 거대한 바위가 나에게로 다가온다. 잊혔던 정열적인 사랑의 기억이 셈 솟는다.

명산을 지척에 놔두고 산의 유혹에 넘어가 같이 사랑을 나눌까 고민을 했지만 북한산 등반은 다음 기회로 놔두기로 하고 방향을 노고산 쪽으로 틀어 조선왕실의 역사를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흥국사에 도착했다. 이 지면을 빌어 고백하지만 그동안 문화유산에 비교적 관심이 많은 필자도 고양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여수 흥국사에 대해 들어는 봤지만, 고양의 흥국사에 대해 알지 못해 흥국사 대방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핑계로 마지못해 갔을 뿐 기대가 전혀 없던 상태였다.

아무런 기대 없이 장소만 찍고 가려던 나에게 절 입구의 거대한 은행나무 몇 그루로 인해 어느새 그 장소에 서서 10분 이상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름드리 은행나무 너머로 가운데 원모 양이 특이한 불이문이 눈에 띄었고, 그 너머로 여타의 절과 다른 양식의 건물이 어렴풋이 보여 높지 않은 계단을 꾹꾹 누르며 한발 한발 조심스레 절의 경내로 들어왔다.

엄숙함과 무게감이 느껴지는 다른 절과 다르게 한구석에는 나무 그네도 있었고, 경내 중앙부에는 조그마한 인공폭포도 흐르지만 그렇다고 돈으로 치장한 경박함은 들지 않았고 정갈하면서 친숙함을 자아내 친한 친구 집을 방문한다는 기분으로 절을 둘러볼 수 있어서 좋았다.
흥국사는 661년 신라 문무왕 시절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고찰이지만 조선왕실과의 인연으로 사세를 더욱 키웠다고 한다. 특히 영조 때 생모인 숙빈 최 씨의 묘원인 소령원에 행차했다가 이 곳에 들른 영조가 현판을 직접 하사하여 약사전을 중건하고, 이후 왕실의 원찰이 되어 조선왕실의 여인들이 흥국사에 많은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흥국사 괘불은 1902년 고종의 후궁인 순비 엄 씨가 발원하고 직접 시주자로 많은 후원을 하면서 제작한 탱화로 조선 왕실의 마지막 시기를 함께 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흥국사의 가장 큰 명물은 중심구역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불전보다 일반 기와집 같은 건축물인 흥국사 대방이다. ㄱ자 건물이 기와집처럼 경내의 중앙에 자리 잡아 불전인지 스님들이 생활하는 요사채 공간인지 성격을 가늠하기 힘든 건물이다. 조선말 염불이 성행하고 접대를 위한 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불전의 공간과 접대와 생활의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이른바 대방이란 건축물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현대에 오면서 대방이라 불리는 건축물은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고, 여기 흥국사에서만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바로 뒤편에 약사전을 중심으로 신앙 중심의 공간은 따로 있지만 이런 양식의 건물은 처음이라 낯선 설렘을 가지고 친절한 스님의 안내를 받아 과감하게 들어가 보기로 했다.

대방 내부의 인상은 수행이나 신앙의 공간보다 어린 시절 시골집에 놀러 갔을 때 한옥 구들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기억처럼 장판을 깔고, 양옥식으로 개조한 부분과 상당히 유사했다. 다만 불상과 탱화는 한편 구석에 존재하고 있어서 그래도 절에 왔다는 생각은 주고 있지만........ 대방 안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나와 먼발치를 내려다보니 멀리서 북한산이 오라고 다시 한번 손짓한다. 해는 점차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있고, 나의 걸음도 재차 빨라지고 있다. 고양의 왕실 흔적들을 살펴보며 생각보다 역사의 향기만으로 오늘을 가득 채워서 이 도시의 연륜이 만만치 않음을 다시 한번 배워본다. 아직도 고양을 헤아리기는 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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