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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Nov 21. 2020

경기 유랑 강화도 편 3-1 (삼도직물)

강화읍, 강화도의 중심

1232년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강화도로 수도를 욺긴 이래 줄곧 강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었고, 지금도 인구 2만명이 거주하고 있는 강화도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강화읍은 고려시대 도읍지로 삼을 때부터 읍내 전체를 성을 쌓으면서 중성, 내성, 외성의 구조로 보호하게 되었지만, 1270년 몽골과 강화조약을 맺었고, 그로 인해 한동안 성은 헐어진 상태로 존재했었다.

시대는 흘러 조선 전기에 들어서고 나서 성벽은 다시 축조 했지만, 1637년 청나라의 침입으로 다시 한번 파괴되었고, 국방을 중시한 숙종때가 돼서야 성벽은 다시 지어지면서 지금까지 잘 보전되어 있는 상태로 남아있다. 그 성벽의 서문을 지나 드디어 강화읍내로 입성한 것이다. 강화읍 이곳저곳에는 강화의 역사 문화가 그대로 숨을 쉬고 있고, 고려시대의 흔적부터 조선시대 역사의 현장들과 근현대사 아픔의 유적, 그리고 현재 활기찬 시장까지 마치 겹겹이 쌓인 세월의 지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단지 두발로 걸으면서 세월여행을 할 수 있는 답사처로 존재한다.

강화읍안에 위치한 여러 스팟들 가운데 어디를 먼저 갈건지 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읍내에는 강화스토리워크라는 길잡이가 있어 그 길을 따라 쭉 가기만 해도 강화읍내의 주요명소를 훑어 볼 수 있다. 용훙궁 주차장에 내리자 마자 언덕위의 한옥성당이 늠름한 자태로 서 있었고, 골목마다 강화의 역사를 짐작하게 해주는 벽화들과 한옥지붕들이 여기가 바로 역사의 고장 강화임을 말해주고 있는 듯 했다.

우선 용흥궁 공원 앞에 왠 굴뚝 하나가 눈에 띄게 외롭게 서있기도 했고, 그 자태가 평범한 굴뚝의 생김새가 아니라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해 먼저 찾아가 보기로 한다. 굴뚝 한켠엔 비각도 함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고, 재봉뜰 모형같은게 같이 보존되어 있어, 어렴풋이 옷을 만드는 공장터인가 짐작을 했었다. 설명문을 차근 차근 읽어보고,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가 바로 강화의 직물산업을 주도한 삼도직물의 터임을 알게 되었다.

삼도 직물은 1947년 창업한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였고, 1970년대에는 역직기 210대와 1200명의 직원이 종사할 정도였다. 당시 강화의 직물산업은 대구와 함께 한국경제를 이끌어가는 큰 존재였고, 강화읍 여기저기에 직물공장이 들어섰지만 본격적인 경제개발이후 한국은 노동집약적 경공업 대신 거대한 규모의 중화학공업 위주로 돌아가게 되고, 중국 등 후발주자로 인한 인건비의 타산성이 맞지 않으면서 강화에 있는 모든 직물공장등은 여기 삼도직물 처럼 굴뚝 만 남았거나, 아니면 카페와 박물관등으로 바뀌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굴뚝만 남은 삼도직물, 심지어 굴뚝도 당시엔 30m가 넘을 정도로 아주 큰 규모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윗부분만 남았고, 그렇기 때문에 공장인지 모를 정도로 흔적을 찾기 쉽진 않지만 그래도 함께 전시된 직조기와 이렇게 라도 남아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뒤에 있는 비각은 눈여겨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연혁을 알고 나면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되는데 김상용을 기리기 위해 만든 순절비로서 병자호란 당시 강화성이 함락되자 순절하신 충신으로 유명하지만 우리에게는 구운몽을 지은 그 유명한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로 더 유명하다. 당시 김상용의 아내도 같이 순절하려 했지만 뱃속에 김만중을 임신하고 있었기에 차마 죽지못하고, 무사히 순산했다고 알려진다. 하마터면 구운몽과 사서남정기의 걸작들이 세상의 빛을 못 볼 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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