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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Dec 08. 2020

경기 유랑 강화도 편 8-1 (가릉)

적막 속 고려왕릉

몽골의 침입을 피해 1232년부터 1270년까지 고려의 임시수도로 삼았던 강화도는 많진 않지만 왕조의 흔적을 섬 전체에 걸쳐 찾을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왕조의 수도였던 만큼 그 기간을 다스렸던 왕과 왕비의 릉 들이 어두침침한 산자락에 조용히 모셔져 있다. 강화도에는 수많은 관광지와 명소가 있지만 고려왕릉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현저히 낮다. 접근하기도 상당히 어려울뿐더러 제반시설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에 초라한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지만 급작스러운 피난 신세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며 그 당시 시대와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화도 전역에 걸쳐 4기가 남아있는 고려왕릉은 남쪽 진강산 기슭에 3기가 비교적 근거리에 있어서 함께 돌아보기 좋다. 하지만 신라나 조선왕릉과 달리 산 깊숙한 장소에 모셔져 있어 찾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특히 주차시설이란 게 없기도 하고 이정표도 정말 부실하다. 잊힌 왕조의 왕릉이라고 하지만 문화재청과 강화군청등 관리를 맡고 있는 여러 단체들의 노력이 정말 절실하다.

먼저 찾은 장소는 원종의 왕비 순경 왕후의 가릉이다. 순경 왕후는 원종이 아직 태자로 있던 시절 충렬왕과 딸을 낳고 16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 안타까운 생을 살았는데, 그래도 고려왕릉 중에 이정표와 길이 비교적 잘 닦여져 있었다. 마을을 지나 어느새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이고 넓은 터에 무덤의 돌방 입구가 노출된 구조로 당당히 모셔져 있었다. 경주의 천마총의 작은 버전이라고 할까? 입구에 유리문이 있어 안을 들여다보는 구조로 현재 만들어진 듯했다. 하지만 봉분 외곽으로 감싸고 있는 보호 펜스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기는 힘들었다.

어쩌다가 석실이 보이는 특이한 형태로 남아있게 되었을까? 고려왕릉은 조선왕릉과 달리 굴식 돌방무덤 형태로 조성돼 도굴이 쉽고, 거의 모든 릉이 일제시대를 거쳐서 도굴되었다고 한다. 2004년에 다시 발굴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 청자 파편을 수습하였고, 아마 그 과정에서 석실을 볼 수 있게 다시 정비를 한 것이라 추측된다. 봉분도 봉분이지만 앞에 세워져 있는 석수와 문인상도 백성의 민묘에서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할 정도로 너무 초라하다.

조선시대 유명한 재상의 무덤들도 석수와 문인상은 정말 크고 화려하게 조성했지만 일국의 군주의 왕비릉이라고 하기엔 그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따져봐도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소나무 숲 뒤편엔 또 하나의 고려시대 봉분이 남아있다. 울창한 숲을 걸으며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능내리 석실분이 하나 더 존재한다. 현재 확인되는 고려왕릉이 총 4기인데 문헌상에는 고종의 아버지인 강종과 희종의 왕비인 성평 왕후 임 씨의 릉도 강화도에 존재한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가릉이 여기가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고 한다.

확실히 터가 가릉보다 넓고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어 왕릉급인 건 확실하다. 능 앞에는 예전에 조선왕릉의 정자각 같은 제를 지냈던 건물의 터도 남아있다. 능내리 석실분을 한 바퀴 돌면서 비, 바람에 깎이며 쓸려간 난간석과 석수 등을 여기저기 살펴본다. 릉은 초라해서 실망감을 남겨주었지만, 그래도 울창한 소나무 숲이 왕릉의 신비감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다른 왕릉들도 천천히 살펴보기로 하고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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