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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Dec 10. 2020

경기 유랑 강화도 편 8-3

적막 속 고려왕릉

진강산 기슭의 3개 왕릉을 둘러본 후 남은 왕릉은 고종의 홍릉뿐인데 다른 왕릉들과는 달리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다. 게다가 가는 길에는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장소가 하나 있어 한번 들렸다가 넘어가기로 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록유산이자 세계에서 손꼽히는 보물인 팔만대장경이 제작되었던 지금은 터와 옆에 조그마한 절만 남아있는 선원사지로 간다.
대몽항쟁 당시 고려의 권력자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해 건립했던 대형 사찰이었던 선원사는 송광사와 함께 고려 2대 사찰로 손꼽히기도 했던 대형 사찰이었다.

이곳에서 팔만대장경을 제작했다고 전해지는데 조선 초기에 서울로 욺 겨졌다가 해인사로 다시 이전하면서 역사가 이어지고 있지만 선원사는 조선초 폐허가 되어 터만 남아있다. 그렇지만 입구에 암자 같은 절이 들어서 예전의 명성을 다시금 일으키려는 계획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기엔 너무 너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분위기라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았고, 뒤편의 절터로 빨리 이동했다. 확실히 터에 들어서니 고려의 왕궁터처럼 계단식으로 거대한 건물터가 일렬로 늘어서서 예전의 위엄 있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고려의 다른 왕릉이나 관련 유적들이 초라했던 모습에 반해 선원사터는 강화에 있는 다른 유적들보다 규모가 크고 광대한 모습을 보며 한편으론 그 당시 고려 사람들이 불교에 대한 의존성이 높았겠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최우를 대표로 하는 무신 권력자들이 백성들을 수탈하고 민심과는 동떨어진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편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절터에서 나와 마지막 목적지인 고종의 홍릉을 향해 출발했다. 강화읍에서 비교적 지근거리인 고려산 자락의 중턱에 위치한 홍릉이고 그나마 고려왕릉들 중에 알려져 있는 편이긴 하지만 역시나 가는 길이 편치 않을뿐더러 국화리 학생 야영장에게 주인 자리를 내주고, 뒤편 깊숙한 곳에 몸을 꽁꽁 숨겼다.

고려 고종은 1213년부터 1259년 까지 무려 36년간 재위했었지만 최충헌과 최우 등 최 씨 정권의 꼭두각시놀음으로 왕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었고, 특히 재위 기간 중에 강화로 천도하여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여기 강화 땅에 묻힌 비운의 왕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도 역시나 국화리 학생야영장에서 끊임없는 오르막길을 오르며 한참을 가야 만날 수 있는 접근이 결코 쉽지 않은 왕릉이다.

갖은 고생 끝에 만나는 왕릉은 30년 넘게 재위했던 왕의 무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초라했고, 산 중턱의 옹색한 터에 자리 잡아 안내판만 없었다면 일반 백성의 민묘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 당시 현실 자체가 왕릉을 건설할 수 있었던 여유 있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물론 잘 안다. 하지만 선원사 같은 대형 사찰이나 팔만대장경 같은 국가적인 대 불사도 수행했었고, 기록에 따르면 최우의 진양부 같은 저택은 누각이 12채가 있고 연못이 끝도 보이지 않는 규모라고 전해지니, 왕의 대우가 정말 형편없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든다.

여태까지 경기도를 둘러보면서 수많은 명승고적들을 다니고 했었는데 특히 이번에 고려왕릉을 둘러보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찾기도 힘들뿐더러 특히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다녔었던 과정 자체가 어려웠던 것 같다. 앞으로 지자체나 관련기관의 관심이 더욱 필요하고 특히 우리들이 고려왕릉을 많이 아끼고 사랑해줬음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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