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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Dec 12. 2020

경기 유랑 강화도 편 9-2 (초지진)

강화의 진과 보 그리고 돈대

강화의 수많은 관방 유적 중 이름값이 가장 높은 장소는 어딜까? 내가 사는 김포에서도 가는 안내판이 있고, 대명항에서 강화 방면으로 가는 다리 이름도 이 장소의 명칭을 본떠 만들어졌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가면 길 건너편에 보이는 그곳은 바로 초지진이다. 강화 5진의 하나였으며 예전에 광활한 풀밭이 있었다고 해서 초지진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교통의 편리함으로 인해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기도 하고, 강화도에서 필수로 찾는 관광명소 중 하나로 유명하다.

하지만 초지진에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망을 금치 못한다. 입장료를 받고 입장을 해야 하는데 정작 볼거리는 일부만 남아있는 옹성 같은 성벽이 전부다. 작고 초라한 요새에 의존하여 외세의 침략을 막았다고 하니 우리 선조들이 불쌍하면서도 미련하다는 생각까지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부만 보고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지금 현재 초지진에 남아있는 시설물은 초지 돈대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초지진 주변 음식점까지 뻗어 돈대와 부속시설을 갖춘 종합 요새의 위용을 당당하게 갖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성곽의 시설에만 집중하지 말고 초지진에서 보이는 강화 바닷가의 풍경과 건너편에 아른거리는 김포 땅의 덕포진을 살펴보면서 이 해협에서 벌여졌던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 다시금 상상해 보는 것이다.

1866년 프랑스군이 천주교 탄압을 이유로 영종도를 거쳐 함락되는 비극을 겪은 장소이기도 하고 이후에도 1871년 통상을 강요하며 미국의 로저스 아세아 함대가 제일 먼저 침략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1875년 일본의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펼치며 나중에는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을 맺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초지진에는 병마 첨절제사 1인, 군관 11인, 군사 320인, 전선 3척이 주둔하였다고 한다.

비록 돈대만 외롭게 남아있는 초지진이지만 바닷가를 바라보며 치열했던 격전의 현장을 한눈에 지켜볼 수 있어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돈대 중앙에 전시된 거대한 대포(홍이포와 400년 넘게 그 자리에서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소나무까지 둘러보니 앞으로 시작될 강화도의 관방유적 순례의 시발점으로는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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