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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Dec 13. 2020

경기 유랑 강화도 편 9-3 (덕진진)

강화의 진과 보 그리고 돈대

강화도 남동부에 위치한 초지진을 시작으로 차 머리를 돌려 강화의 해안을 따라 북으로 이동한다. 초지진에서 덕진진에 이르는 길을 무척 정겹고 예전 시골길을 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본인이 경험한 강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는 장소다. 비록 세상일이 어지러워 바깥세상은 시끄럽지만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길을 달리며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했다.

어느새 거대한 성문을 눈 앞에 두면서 덕진진 주차장에 도착했다. 확실히 일부 성곽만 남아 있는 초지진에 비해 규모가 크고 잘 보존되었다. 덕진진은 용두돈대와 덕진 돈대를 거느리고 덕진 포대와 남장 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 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던 강화도 제1의 요충지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가 이끄는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우선 덕진진의 정문인 공 조루까지 걸어가 성문 너머 잔잔하면서 좁은 강화의 바닷가를 바라봤다. 전쟁에 관련된 사적지를 방문하며 예전의 일을 상상하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다. 특히 전투에 임했을 병사의 심정이 되어 보며 죽을 각오로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괴로울지 짐작하기 쉽지 않다.

공 조루를 지나 해안선을 따라서 언덕길을 힘차게 올라가 본다. 중간 지점에 휴게소가 있었지만 잠긴 자물쇠는 녹이 슬어있었고 창문에는 거미줄이 끼어있었다. 그래도 언덕 위에 벤치가 곳곳에 놓여 있어, 바다를 감상하며 피로했던 몸을 잠시 쉬어가기 좋았다. 한동안 멍을 때리다가 다시 반대편 언덕으로 내려갔다.

멀리 반대편을 바라보니 대포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위용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15문 대포가 반달 모양의 요새로 축조된 남장 포대가 바로 그곳이다. 지대가 낮고 두 개의 언덕 사이의 낮은 지대라 아마 방비가 취약한 지점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집중적으로 화력을 집중시킨 듯한데 실제로 신미양요가 일어났을 때 미국의 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이 펼쳐졌던 장소라고 한다. 하지만 미국의 최첨단 화기와 사정거리나 위력에 비할바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포대의 높이도 낮아 이런 장소에 의지해 나라를 지킨 우리 조상들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갈까 말까 고민이 조금 들었지만, 가파른 언덕을 한번 더 치고 올라가 사각형의 요새인 덕진 돈대로 올라간다. 강화 수로의 가장 중요한 요새 역할을 했었고, 덕진진의 주요 요충지였던 만큼 역시 이 장소도 미국과 치열한 포격전이 펼쳐진 곳이다. 요새 바로 밑에는 웬 비석이 바다를 노려보듯이 위엄 있게 서 있어 그 연유가 궁금해서 다가갔다.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세워진 덕진진 경고 비라고 적혀있었다. 외국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경고문이 적힌 척화비의 일종이라 봐도 될 것 같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다시금 떠올려보며 과연 쇄국정책을 행한 게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항상 논쟁을 했던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일본은 개항하고 외국의 문물을 잘 받아들여 메이지유신을 이뤄냈고, 근대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쇄국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개방을 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나라는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라고 본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근대화가 되었다는 전제는 정말 틀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이미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서양의 문물에 대해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있었고, 에도막부 시절 상업의 발달과 서민문화의 발전으로 인해 근대화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섣불리 서양세력을 받아들이다가 결국 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쇄국정책이 무조건 옳은 정책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지만 어느 정도 받아들일 요건을 갖추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개방을 하는 게 옳은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당시 힘을 갖추지 못했기에 세계사의 흐름에 끌려다니다가 나중엔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덕진진의 비석 하나가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역사란 항상 교훈을 주고 현재 우리의 삶의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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