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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Dec 15. 2020

경기 유랑 강화도 편 9-4 (광성보)

강화의 진과 보 그리고 돈대

겉보기와 달리 규모가 꽤 컸던 덕진진을 지나 3대 관방유적의 마지막 장소인 광성보를 가기 위해 한번 더 차에 오른다. 초지진과 달리 덕진진에서 꽤 시간을 보냈기에 어느새 점심시간이 지났었고, 배가 고픈 상태였다. 하지만 광성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진이 아니라 보니까 진보단 규모가 작겠지 그런 무심한 생각을 하고는 광성보를 최대한 빨리 돌아보고 근처에서 식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광성보에 소속된 돈대만 무려 3개였고, 돈대 사이의 거리도 꽤나 길었으며 중간중간 순국한 의총과 비각 등 볼거리도 앞의 요새 유적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았다. 비록 초지진보다 이름값은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그 중요성과 역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광성보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역시 강화 외성의 일부로서 존재하다가 특히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알려졌다. 특히 어재연 장군을 중심으로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광성보로 가기 직전 로터리에는 어재연 장군의 동상이 늠름하게 우리를 반겨주었다.

광성보에 오르자마자 안해루라는 이름을 가진 성문이 먼저 시야에 들어오고 그 성벽과 이어진 지점에 광성돈대라는 원형의 돈대가 함께 연결되어있다. 돈대를 한 바퀴 돌아보며 앞으로 시작될 광성보 행군 전 마음가짐을 다시 잡았다. 안해루 성문에서 비각까지 오르막길로 쭉 올라가야 하는 여정이 쉽진 않다. 덕진 진도 그리 작진 않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광성보에 비하면 아이와 어른의 차이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왼편 너머로 보이는 강화의 바다를 옆에 끼고 거북이걸음처럼 한발 한발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비각이 있는 너른 공터에 도착하게 된다.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데 하나는 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무명용사비와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의 비각 양식으로 서 있는 쌍충 비각이다.

우선 쌍충 비각에 대해 조금 알아보자면 신미양요 때 순국한 두 장수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재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각이고, 옆의 무명용사비는 역시 신미양요 때 끝까지 항전한 병사들을 위해 현대에 들어 다시 세운 용사비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조금 씁쓸했다. 물론 두 명의 장수 역시 나라를 위해 최후까지 항전했기에 그 비석을 세워주었지만 왜 수십 년 세월이 흐를 동안 전쟁에서 희생된 다른 병사들은 기리지 않았는가? 단지 백성들은 권력자들의 단순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바로 언덕길 밑엔 신미 순의 총이라 해서 광성보 일대에서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모셔져 있다. 여기서도 두 장수는 따로 모셔져 고향인 충북 음성에 묻혀있다고 한다. 남은 51인은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개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했다고 하는데 신원은 분별할 수 없을 정도면 2 장수의 신원은 어떻게 구별했는지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우리나라를 지키신 순국선열들에게 묵념을 가볍게 드린 후 햇살을 가릴 정도의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호젓한 광성보의 숲길을 걸었다. 길을 걷다가 어느새 바다와 산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지만 그 갈림길의 끝에는 돈대가 각기 위치해 우선 산으로 올라가 그 끝에 있는 손돌목돈대를 돌아보기로 했다. 강화의 바다를 훤히 내려다보는 위치에 독수리 요새처럼 우뚝 선 손돌목 요새는 신미양요 당시 제일 치열했던 백병전이 펼쳐졌던 장소로 변변한 무기도 없이 싸우던 병사들이 전원 전사하는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 위에 설치된 천연 요새인 용두돈대를 향해 걸어갔다. 여태까지 수많은 돈과 성곽을 다녀봤었지만 해안절벽 위에 있는 입지 자체가 특이하기도 했고, 양옆에 바다를 끼는 느낌 자체가 정말 특이했다. 돌아오는 길이 멀어 걱정을 했지만 광성보의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니 어느새 출발점인 안해루로 돌아오게 되었다. 시간은 점심을 넘어 늦은 오후가 되었지만 가슴속이 벅 차오르며 뭉클해지는 좋은 기억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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