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많이 풀려 집 근처 공원에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옆 동네 공원으로 갔다. 아이들이 철봉에 매달려 노는 동안 옆에서 놀던 6~7살쯤 되는 아이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인다.
"외국인인가 봐."
"한국 사람이랑 외국인이랑 대화해."
"미국에서 왔나 봐."
"무슨 말하는지 가서 볼까?"
"영어를 하나 봐."
"한국말도 할 줄 아나 봐."
"외국인은 이마에 빨간 게 있고 거기에 기도를 한 대."
"햇빛에 계속 있으면 얼굴이 외국인처럼 된다. 까맣게 된대."
우리가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을 못 하는 아이들이 계속해서 말한다. 심지어 직접 와서 구경하듯 아이들을 쳐다보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그 순간에는 아무 말하지 않아서 못 들은 걸까 싶었다. 하지만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쉴 새 없이 뱉어낸다. 그 아이들이 내뱉은 말들을.
"그런 말을 속으로 하던가, 왜 다 들리게 하는 거야? 듣는 사람 생각도 안 하는 거야?"
둘째 아이가 말한다. 둘째는 지나가다가도 내가 하는 말에 멀리 있는 상대방을 생각하는 아이다. 그날도 공원에 들어서기 전에 한 아이가 발을 동동거리며 울길래, 둘째 아이에게 "너도 어릴 때 저런 적 있었는데." 말했더니, "그 아이가 안 좋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말자." 해서 무안해지기도 했다. 둘째 아이다운 생각이었다. 속으로만 생각하고 입 밖으로 내뱉지는 말 것!
봇물 터진 아이들은 여기서 멈추질 않았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도 내뱉었다.
"외국인이야?" 묻는 건 기본이고 그 외 많은 말들을 학교 아이들이 했는데 가장 큰 충격적인 멘트에 모든 걸 다 잊어버렸다.
"흑인도 학교에 다녀?"
그 말속에는 많은 게 담겨 있다.
1. 우리 아이는 흑인이다. 2. 흑인은 학교 다니면 안 된다. 3. 흑인은 배우면 안 된다. 4. 나는 흑인이 아니다. 고로 나는 흑인보다 우월하다.
꼬리에 꼬리가 이어진다.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서 아빠의 모국에는 아직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채, 순수 한국 교육과정을 밟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외국인'이라는 말에 질린 듯하다. 한국 사람인데, 계속 외국인이라고 하는 게 싫다고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때면 아이들 국적 관련한 질문을 많이 받곤 해서 나도 지치곤 했는데 내가 없을 때 그 질문을 아이들이 고스란히 다 받다 보니 아이들도 지친 것 같다. "한국인한테 왜 계속 외국인이라고 하는 거야?"
아이들은 쉬지 않고 말하는데, 나는 흑인도 학교 다닌다는 그 말에 충격받아 한참 생각에 빠져서 아이들이 하는 말 대부분 흘려보낸 듯하다. 어른다운 멋진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 아이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주고 싶었다. 한참 고민 끝에 아이들에게 나름 맞춤 형 처방을 내렸다.
5학년인 큰 아이에게는 "너는 한국인인데 영어는 왜 배워?"라 응수하라 했다. 한국에 살면서 영어 한 번 안 배우고 초중고 졸업할 수 없으니 그 아이에게 "한국인인데 왜 영어 배우냐?" 하라는 유치한 발언을 가르쳤다. 아직 초등학교 2학년인 작은아이에게는 "내가 너보다 한국어 더 잘하는데?" 하라고 알려줬다. 물론 우리 아이가 한국어를 다른 아이보다 더 잘하는 건 아니다. 작은아이 말에 의하면 다른 아이보다도 글씨 쓰는 속도는 빠르다 한 말을 떠올려 그렇게 말했다. 유치하긴 하지만 그 아이가 국어를 더 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아이가 밀리는 건 아니다. 그 아이는 부모 모두 한국어가 모국어니까 더 잘하는 게 맞는 거잖아?
나의 유치하고 옹졸하기 그지없는 발언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아이는 자기와 친한 친구들은 그런 발언을 하지 않는다며, 학교에서 배운 인권에 관해 이야기를 해줬다. 백인, 흑인 등 피부색, 외모에 상관없이 모두 다 동등한 권리는 갖는 게 인권이라 배웠다고 했다. 학교 내에서 인권 교육도 이루어지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교육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움은 있다. 교육이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걸까?
아이들이 못 들을 거라 여기며 공원에서 그 어린아이들의 말을 들으면서도 못 들은 척 있던 게 뒤늦게 후회가 된다. 이런 일들이 쌓여서 아이들에게는 상처로 남을 텐데 왜 그냥 있었던 걸까. 그 옆에 아이들 입단속 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어른에게도 화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