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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선 May 13. 2024

나보다 어린시절의 엄마에게 | You before me

공선옥, 『춥고 더운 우리 집』, 한겨례출판, 2021

 우리 엄마한테 네 얘기를 가끔 들어. 나는 어릴 때부터 너 같은 애가 무섭더라. 같은 반 또래였다면 말도 못 붙여봤을걸. 차가운 분위기에 말수도 적고, 세상이 널 무시하기 전에 감히 세상을 따돌리는 애. 넌 무심함 못지않게 날카로운 애였나 봐. 그렇지 않으면 며칠 전처럼 선배들한테 대들다가 혁대로 맞을 뻔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선도부 선배들이 도시에서 전학 온 네 기강 좀 잡아보겠다고 동기들을 우르르 모이게 한 교실에서 (이름은 미녀지만) 마녀로 통하던 선배를 요란하게 밀쳤던 것도, 그 소문을 들은 선배들이 이번엔 또 우르르 몰려가 혁대로 때리겠다고 윽박을 지르는 화장실 구석에서는 순순히 엎드려뻗쳐 도리어 기를 죽이는 것도 네게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지. 네게는 선배들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언니들이 있었으니까.


  그 후로 널 마주치는 애들은 직접 말은 못 걸고 “어, 나이키 온다” 하고 속닥거리곤 하잖아. 숏커트 헤어스타일의 뒷머리가 뻗친 모양 때문에 ‘나이키’라고 붙은 별명이 너도 내심 싫지 않다고 하던데. 넌 이런 시선을 즐기기는 하지만 너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괴롭혀본 적도 이용해 본 적도 없어. 너를 따라다니는 소문과 오해만 무성하지. 선생님 기준으로는 ‘야한’ 어른 옷을 입고 다녀서 전학 온 첫날부터 찍혔는데 심지어 학교에 안 나오는 날도 있었으니까.



나는 가난했던가? 사실 가난했다기보다 나는 외로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외로움이라고 해놓고 보니 이것도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배는 고팠지만 가난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처럼,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나날들이 심심하고 따분하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외로움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외로움’이라는 말의 의미도 잘 몰랐다. 우리는 그때, 외로움이라는 말보다는 서러움, 혹은 설움이라는 말을 먼저 배웠다.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은 서러운 것이었다.

- 공선옥, 『춥고 더운 우리 집』, 226쪽



  재작년 읽은 책의 한 대목에서 네가 생각났어. 당연히 너를 불량학생이라고 생각하는 선생님과 학교 애들의 시선에 질려 결석이 잦아졌을 때, 너는 외롭다는 말을 하면서 외로워했을까, 그런 말은 할 줄 모르고 왜인지 서러워만 했을까. 사실 너는 옷을 살 형편이 안 돼서 언니들 옷을 물려 입었던 건데. 학교는 빠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있던 심장병 때문에 몸이 힘들어져 못 나왔던 건데. 하지만 너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을 거야. 어쩌면 그 시절 네가 지킬 수 있는 건 자존심밖에 없어서 그랬을지 모르지.



  너는 동경하는 애들은 많은데 말을 걸기에는 새침해서 친구가 없는 애, 키도 크고 얼굴도 까무잡잡해 ‘머스마’ 같은 애야. 근데 난 알아. 투박해 보이는 네 속엔 세련된 우울도 좋은 음악과 문장을 보고 감동하는 안목도 있다는 걸. 실은 눈물이 많은데 우는 건 또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애라는 걸.



“기숙사 방에서는 절대로 울면 안 된다. 울면 자기만 손해다. 아무도 왜 우는지 물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울고 싶으면 조용히 기숙사 방을 나가 공장 대문 건너편에 있는 구멍가게에 가서 초코파이를 사서 뜯어먹으면 된다. 혹은 열일곱 살 순분이처럼 제 캐비닛 문짝으로 몸을 가리고서 먹든가. 누군가 울면, 우는 것을 보는 것은 신경질 나는 일이다. 그래서 더욱 매정해져야 한다. 울음에 매몰차게 굴어야 내 울음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의 베테랑들은 일찍이 열몇 살 때부터 기숙사 방에 살며 깨쳐온 셈이다.”

- 같은 책, 59-60쪽



  넌 울고 싶으면 뭘 했을까. 너는 언니 동생들이 다섯이나 있잖아. 울기만 하면 왜 우는지 물어주고 달래줄 사람도 많았을 텐데. 말도 없고 엄살도 없고, 친구도 없고 의욕도 없고 눈빛만 매서운 너. 나이답지 않게 꼿꼿한 너. 너는 너의 삶이 기대가 되니? 졸업을 하고 성인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모두들 당연히 밟으리라 생각하는 인생의 경로를 생각할 때 말야. 그냥 지금이 너무 싫어서 미래에 대한 기대가 가려져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해.


  오늘 학교 선생님께 불려 갔다고 들었어. 너와 선배들 사이의 소란은 네 잘못이 아닌데 타박받고 덤으로 네 옷차림과 무단결석에 트집이 잡혔다고. 순하고 착하셨던 너희 어머니는 교장 선생님께 “참 착한 애한테 왜 그러냐”고 따지셨지만 결국 시골 애들이 입는 성에 안 차는 옷으로 널 갈아입히셨지. 그 옷을 입고 박차고 나온 교실로 다시 향해야 했던 너의 마음을 생각해 봐. 다가오지는 않고 수군대는 아이들과 환영하지 않는 선생님이 있는 고등학교로 돌아가는 열일곱 살 연화. 잠시 뒤돌아봤을 때 마주친 창문 너머 손을 흔드는 엄마의 모습을 40년이 지나도 기억할지 모르고 터벅터벅 학교로 향했을 너의 모습을.



  나의 생활을 한편으로 연민하면서 또 한편으로 버리고 싶은 기분으로 살았다. 어린아이가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견디기 힘든 어떤 국면에서 손톱을 물어뜯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나는 내가 맞닥뜨린 모든 곤혹스러운 상황들 앞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살아왔다.

- 같은 책, 11쪽



  내가 지금 읽어주는 책의 작가는 여러 집에 전전하며 살았어. 구식이지만 정겨웠던 오두막집, 엉터리로 지은 *부로꾸집, 간신히 사람 하나 들어가는 하숙집 단칸방, 남들 눈 피해 몰래 울어야 했던 공장 기숙사, 가난의 대명사였던 영구임대 주택…. 작가는 살아왔던 집 이야기와 거쳐왔던 인생 이야기를 엮어 들려줘. 책의 제목처럼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집이 아니라, 더울 때는 꼼짝없이 덥고 겨울에는 무참히 추워야 하는, 계절을 있는 대로 받아내야 하는 우풍 드는 삶을 사셨더라고.

*블록집


  책 말고 너에 대한 스포일러를 조금 하자면, 너도 인생의 경로를 따라 자주 이사를 다닐 거야.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계단에서 기다리곤 하는 상계동 시댁 집, 남편 형이랑 같이 써야 하는 원룸 집, 금세 벗어나고 싶어지는 구리 반지하, 비싸 보이지만 월세가 어마어마한 사당동 단독주택, 월세가 지긋지긋해 얻은 비가 새는 오오래된 전세 빌라…. 오늘의 설움이 작아 보일 정도로 다양한 설움이 찾아오기도 할 거야.



좋은 집의 첫째 조건은 손볼 곳이 많은 집이라 했다. 아, 그러면 그 집이 바로 우리 집이 아닌가. 완성된 집은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서 좋지도 재밌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곳저곳 손볼 곳 많은 집, 뭔가 엉성한 집,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싶은 여지가 많은 집, 남들이 아, 좋다, 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집, 그러나 언제나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집.

- 같은 책, 127쪽



  왜 나는 작가가 집 얘기를 들어 인생 얘기를 하는 것 같을까. 너의 앞으로의 인생도 “손볼 곳이 많”아 좋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는 상상이 되니? “남들이 아, 좋다, 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인생일 수도 있지만 내가 지금 보는 40년 후의 너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인다는 걸. 네가 걸어온 역사를 안다면 누구도 너랑 바꿔 살고 싶다고 쉽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삐걱대고 꼬여가는 인생을 직접 버겁게 손보기도 하면서, 그러나 신의 도움으로 가볍게 고치기도 하면서, 너는 참 눈부시게 살거든.


  너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종교적인 이야기를 길게 하면 싫어할 것 같네. 하지만 오래 쌓인 너희 엄마의 기도가 네게 돌아온다는 것만은 분명해. 너 또한 날 위해 그렇게 기도하는 엄마가 되니까. 넌 네가 거쳐 간 그 많은 집들에서 눈만 덮어주면 곧 잠드는 순한 아기도 낳고, 그 아기를 잘 키워보려다 카드 돌려 막기로 빚도 지고, 옷도 팔다가 보험도 팔고, 혼자 앓기도 하고, 돌려 막던 빚에 미칠 것 같을 때 때마침 생긴 파산 제도로 회생하고, 이 무수한 언덕들을 씩씩하게 기어오르다 거짓말처럼 행복해져. 인생이 무거워져도 구겨지지 않고 다정한 어른, 굶던 사람 먹이고 죽으려던 사람 살리는 멋진 어른이 돼. 그리고 지금은 믿기 힘들겠지만, 너의 천사 같은 엄마랑 눈매도 성품도 꼭 닮은 엄마가 되지.



이제 막 신부 서품을 받은 아들에게 어머니는 아들이 애기 때 입었던 옷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신부님, 신부님도 이렇게 작은 애기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아, 한때는 애기였다. 선인도 악인도 세상 똑똑한 사람도 세상 어리석은 사람도 다아.

- 같은 책, 213쪽



  학교도 싫고 선생도 싫고 가난도 싫고 아픈 내 몸도 세상도 싫을 연화야. 시간이 지나 나를 낳아 기르고 이 편지를 받아볼, 읽어가며 코끝이 찡해질지 모르는 연화야. 나는 나보다 어린 열일곱 살의 너를 생각해 봐. 지금보다 무섭고 지금보다 외로운 너를. 어른 김연화 엄마 김연화가 되기까지 분명 거쳐왔을 너, 들은 이야기만으로 조각조각 이어 붙여야 보일 듯 말 듯 한 너를. 네게 말해주고 싶어. 인생의 모든 설움이 네 그늘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문득 아무 일 없이 전화한 딸에게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다며, 울고 싶은 오늘을 웃으며 말하는 날도 올 거라고.


  나는 지금 40년 후의 너를 보고 있지만 50년 후의 너는 또 얼마나 더 멋질까, 60년이 넘도록 더 오래오래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나도 아직은 가보지 못한 미래지만 넌 분명 아무리 오래 살아도 고집 세고 표독스런 할머니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너는 우리 할머니가 더 오래 살았다면 하고 있을 그 눈매, 그 미소로 늙어갈 거라고 확신해. 그리고 언젠가 네가 없고 더 이상 너의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사라지는 날이 오기 전에, 내가 아는 것보다 어리고 젊은 연화의 역사를 많이 듣고 많이 기록하기로 다짐해.


  이건 너를 통해 내가 만난 세상에서, 아직 내가 없는 세상으로 보내는 편지야. 미리 고맙고, 미리 사랑해. 너의 10대와 나의 10대는 너무 다르지만 미래의 너와 같은 아줌마, 더 미래의 너와 같은 할머니가 되는 게 나의 꿈이야.



(2023.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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