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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선 May 11. 2024

K-장녀가 K-막내에게 | 젊은 희진의 행진

이서수,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많이들 똑 닮은 가족의 이목구비를 보며 유전자의 신비를 말하지. 하지만 진짜 신비는 유사한 유전자를 가진 혈육이 확연히 다를 수도 있다는 거야. 우리 둘의 얼굴만 봐도 그래. 내 얼굴은 사람의 얼굴뼈가 어디까지 동그래질 수 있는지, 반면 네 얼굴은 어디까지 예리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잖아. 심지어 눈과 코와 입술의 어느 한 윤곽도 겹치지가 않아.


  인간과 침팬지 유전자 구조의 차이는 1.6 퍼센트래. 같은 배에서 태어난 우리의 DNA 차이는 그보다 더 극극극미량일 텐데. 이상하지 않니.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와 자녀의 닮음보다 놀라운 건 자매의 다름이야. 심지어 외모는 우리 사이의 수많은 차이점 중 하나일 뿐이지. 서로를 보며 왜 저래 싶은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니.


  내가 최근에 읽은 단편소설에서도 자매가 나와. 언니는 오문희고 동생이 오근희야. 오문희는 오근희를 이렇게 설명해. 언니가 빌려준 보증금으로 세 들어 사는 동생. “서른 가까운 나이에도 실용적인 생각은 할 줄 모르는 애”. ‘어떤 일도 진득하게 붙들지 못해서 회사에 들어가도 버티지 못하고 단기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한 게 더 길었던 애’. 이 언니가 동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알 것 같지 않니.


  남들이 보기에도 근희는 그런 애였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야. 언니라서 저렇게 말하는 거지. 가까운 사이일수록 별로인 점이 하나둘 보이는데, 한 집 살았던 자매는 어떻겠어. 맨얼굴과 맨 인격을 가장 자주 공유한 사이잖아. (우리 주변에 집희선 집희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혈육 간에는 왜인지 장점보다 단점이 더 크게 보이곤 해. 남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서로에게는 유독 거슬리잖아.


  이 소설을 처음 읽는 첫째들의 마음을 맞춰볼까? ‘그래도 내 동생은 저 정도는 아니야’ 일 걸. 하지만 곧 오문희의 마음이 되어서 오근희의 등짝을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 들 거야. 왜냐하면 오근희는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유튜브를 시작했거든. 책을 소개하는 일명 ‘북튜버’인데 왜인지 방송에서는 매번 가슴 파인 오프숄더를 입어. 이런 방송 계속할 거냐는 언니의 타박에는 연락을 두절해 버리고. 속이 터지지. 3개월간 잠수를 타다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더 기막히단다.



언니는 나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 나 북튜버 하면서 약간 똑똑해졌어.

(…) 언니, 관종이 되려면 관종으로 불리는 걸 참고 견뎌야 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언니는 모르지? 한 가지 더 언니가 모르는 게 있어. 관종도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거야. 그걸 왜 모를까. 왜겠어. 언니가 꼰대라서 그런 거지.

- 이서수, 「젊은 근희의 행진」, 『젊은 근희의 행진』 156쪽



  이 뻔뻔한 말투를 좀 봐. 내가 "이건 네가 잘못했잖아"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네가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잔소리 스탑삣-"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틀었을 때 내 혈압이 얼마나 치솟았는지···. 편지를 받은 근희의 마음을 약간 이해할 수 있었어. 보통 이런 류의 분노는 장녀의 몫이니까.


  하지만 수많은 언니들이 간과하는 게 있어. 동생 몫의 서운함도 있다는 거야. 언니라는 사람들은 동생들에게 좋게 조언하는 법이 없잖아. 조언과 윽박이 세트처럼 함께 가지. 내가 생각 없이 그런 게 아닌데. 내 의도는 그게 아닌데. 내 나름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건데. 언니들은 쉽게 넘겨짚어 버리잖아.



나는 언니가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꼰대가 되어버린 게 슬퍼. (…) 나는 맨날 부동산 얘기, 연금 얘기만 하는 언니가 차라리 대놓고 자긴 꼰대라고 말했으면 좋겠어. 정색하면서 안 그런 척해서 얼마나 꼴 보기 싫은지 몰라. 언니는 자기가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을 깎아내릴 때 쾌감을 느끼는 언니를 볼 때마다 참 속물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 언니는 내가 참 모순되는 말만 한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나는 언니가 가장 모순적인 사람 같아.

- 같은 책, 158-159쪽



  내게 쓴 편지를 읽는 것도 아닌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민망해졌어. 문학이 어쩌고 인권이 어쩌고 하다가도 너무 쉽게 저급한 말을 해버리는 내 모습을 너는 어떻게 봤을까? 그 모습은 너밖에 모르잖아. “언니는 자기가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지”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들이 네게도 많았을 거야. 물론 너는 저렇게 말하는 대신 셀카 찍는 나를 보며 “언니는 언니가 귀여운 줄 알지?”라고 말했지만.


  우리가 이렇게 소설을 읽으며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소설에는 '전형적'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야. ‘신이 누구누구를 만들 때’라는 밈 알지? 그 밈에서 신이 한 가지 특성을 우르르 쏟아버리곤 하잖아. 작가도 인물을 만들 때 일부러 어떤 특징을 과하게 넣어. 그래야 소설을 읽으며 현실 속에서 비슷한 특성을 가진 누군가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모든 언니가 문희 같지 않겠지만 그는 K-장녀들을 대변할 만한 동생 한정 꼰대스러움을 가지고 있어. 마찬가지로 모든 동생이 근희 같지는 않겠지만 근희 또한 수많은 K-막내들을 대변할만한 언니를 동경하면서도 무시하고 싶은 애증이 있고. 문희는 K-장녀의 전형이고 근희는 K-막내의 전형인 거지. 그리고 이런 마음은 대한민국 모든 자매들의 ‘전형적’ 마음이 아닐까.



언니가 사람들한테 미움받는 게 싫거든. 내 언니니까 나만 미워할 수 있어.

- 같은 책, 161쪽


지들이 뭔데 내 동생을 욕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 있는 권한은 나한테 밖에 없었다.

- 같은 책, 149쪽


  그리고 소설 속에서 이 전형적 인물들은 어떤 사건을 만나 변화돼. 이게 소설이라는 장르의 기본 구조야. 인물, 사건, 변화. 이 변화는 등장인물 자신만 눈치챌만한 작은 내면의 변화이기도 하고 한 세상이 구원되거나 멸망하는 크고 외적인 변화이기도 해. 하루에도 몇 번씩 사건과 변화를 겪는 우리는 아직 한창 집필 중인 20년짜리 서사와 28년짜리 서사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너와 나는 다른 사건을 만나 다르게 변화될 거야. 우리는 각자의 책을 쓰고 있으니까. 화성학 공부나 데이트 거절처럼 내가 먼저 겪어본 건 자신 있게 조언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조언이 크게 의미가 없는, 너만의 선택이 필요한 일이 앞으로는 많이 생길 거야. 혹은 내가 말려도 네가 기어코 가고 싶은 길이 생길지도 모르지.



언니, 언니는 어떤 존재일까. 나와 비슷한 유전자를 갖고 나보다 먼저 살아본 사람일까. 언니가 성공한 일을 나도 성공할 수 있을까. 내가 성공한 일을 언니는 아무리 해도 실패하지 않을까.

언니, 나를 좀 믿어주면 안 될까.

- 같은 책, 160쪽



  네가 내가 꿈도 못 꿀 낯선 길에 들어설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응원할 수 있으면 좋겠어. 기억했으면 좋겠어. 내가 실패한 일을 네가 성공하기도 했다는 걸. 내가 그만뒀던 음악을 네가 더 공부해서 실용음악을 전공할 줄은 몰랐던 것처럼. 처음 네가 녹음실에서 불렀던 “Dancing with your ghost” 파일을 열어봤을 때의 경이는 아직도 잊지 못해. 내가 음악을 한다 해도 너만큼 잘 해내지는 못했을 거야.

 

  우린 다른 몸, 다른 성격, 다른 재능을 가지고 다른 길에서 행진하고 있어. 나의 결혼처럼, 언젠가의 네 독립처럼 우리 사이 거리가 멀어지는 분기점들도 계속해서 생기겠지. 각자의 길을 가느라 서로를 요란하게 응원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전진하면서 누구보다 너의 행진을 자주 힐끔거릴 거야.


  언니랑 조금 떨어져 본 일상은 어때. 몇 개월 전만 해도 우린 싱글침대에 나란히 등 쿠션 대고 앉아 새벽 두 시가 넘도록 메탈밴드 노래를 들었잖아. 그러다 엄마가 잠결에 화장실 다녀오는 소리라도 들리면 자라고 할까 봐 바퀴벌레 속도로 이불 덮고 숨죽이고. 확연히 다른 취향인데도 플레이리스트에 겹치는 노래는 또 명곡이어서 익숙한 전주에도 매번 함께 감탄했던 밤도 많았지.


  너도 문득 이런 기억을 떠올려보니. 안 그러겠지. 언니가 없는 건 하나도 안 허전하고 방 혼자 쓰는 게 마냥 좋기만 하니. 그렇겠지. 그런 건 괜찮아. 하지만 언니가 일주일에 한 번 무슨 글 쓰는지도 궁금하지 않다니. 내 글쓰기 구독 1차 접수에도 2차 접수에도 유희진의 이름은 보이지 않더구나. 간만에 온 디엠에(“언니 뭐 입을까”, “언니 학습 목표 뭐라고 쓸까”, “언니 이럴 때 뭐라고 말할까”) 성실하게 대답해 주면 뭐 하니.


  여튼, 내가 쓰는 글에는 큰 관심이 없더라도 무슨 일 있으면 얘기해. 혹시 나만 혼낼 수 있는 너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다면 같이 욕해줄게. 나는 K-장녀라기엔 많이 헐렁한 사람이지만 “내 동생은 나만 욕할 수 있어”의 마음만은 탑재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안 할만한 상욕으로 다져줄 수도, 걔의 행동이 왜 주관적으로 서운할만하며 객관적으로 잘못되었는지 조목조목 짚어줄 수도, 걔가 한 말에서 논리가 맞지 않는 부분을 비아냥거리고 비꼬아줄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각자의 서사를 쓰고 있다고 했지. 하지만 아이언맨과 캡틴아메리카가 각자 시리즈의 주연이지만 서로의 스토리에 끼어들어 같이 빌런을 물리치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의 삶에 가장 비중 있는 조연으로 함께 할 거야. 네게 메시지가 왔을 때의 반가움도, 네가 받은 칭찬에 내 일처럼 자랑스럽게 부푸는 마음도, 널 위해 하는 기도도 모를 동생아. 이 편지는 네게 꼭 읽히기를 바랄게.



(2023.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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