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자서전에서 밝힌 소원입니다.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아, 대한민국은 이 말을 그대로 실현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 10위권에 드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음악, 영화, 음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 세계의 문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광복 77주년, 독립을 향한 열망
어느덧 77번째 광복절을 맞았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광복절을 단지 휴일로써 반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많은 목숨들이 희생된 만큼, 결코 그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를 뛰어다닌 독립운동가
우리 선조들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대내외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먼저, 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에 우리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지요.
몽양 여운형 선생은 독립청원서를 두 통 작성하여, 한 통은 파리 강화 회의 미국 대표단을 통해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도록 하였습니다. 나머지 한 통은 상하이 '밀러드 평론' 발행인 토마스 밀러드에게 전달했어요. 그뿐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체코 독립군의 가이다 장군을 만나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목숨을 바쳐 싸운 무장독립단체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일제에 저항하고 싸웠습니다.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조선의용대 등 많은 무장독립단체들이 우리나라와 만주 등을 오가며 목숨 바쳐 항거했어요. 특히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에 대승을 거둔 전투로 유명합니다.
이때 일본군은 "어떻게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상대에게 질 수가 있느냐"라며 수치스러워 했다고 해요. 아닌 게 아니라, 당시 열악한 환경에 놓였던 우리 독립군은 어떻게 무기를 구하고 싸울 수 있었을까요?
새벽에 이루어진 은밀한 거래
흥미롭게도,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 장군의 회고록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의 철쇄로부터 해방되어 미, 영, 불의 원조 아래 자유 민주국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 그들은 한국 독립운동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지난날 그들 자신이 오스트리아 철제 아래 지내온 노예 생활을 회상하여 동정심을 보였다. 마침내 그들은 우라디보스토크의 무기고에 저장한 무기를 우리 북로군정서에 팔게 되었다. 이 매매는 깊은 밤 빽빽한 삼림 속에서 이루어졌다. (…) 작은 대포, 중기관총, 일제 및 러시아제 소총, 수류탄 등등… 더욱이 적에게 피의 빚을 청산할 80만 발의 탄환까지 끼어서.
우리 독립군과 체코군단의 관계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집중적으로 접촉했고, 독립군의 무기 조달은 일본 측의 자료에 의해서도 확인됩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1920년대 우리나라 독립군은 체코군단이 쓰던 무기를 받아서 썼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어요.
이처럼 과거에는 우리의 슬픈 사연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나라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알고 동경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조상들의 고투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 만세!"
* 이 포스트는 《유럽사를 바꾼 독립운동 이야기》의 일부를 발췌하여 재구성하였습니다.
* 책과 관련된 자세한 정보는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1405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