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콩(이집트 콩 이라고도 불린다)을 처음 접한 건 고3, 졸업을 앞두고 다이어트에 돌입했을 때다. 다이어터에게 병아리콩이 간식으로 좋다는 글을 보게 된다. 바로 병아리콩 스낵. 간식을 갈구하던 참에 콩을 좋아하는 편이라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엄마, 아빠와 이마트 장 보러 가는 날을 기다렸다. 주말 저녁, 카트 안에다 3킬로짜리 병아리콩을 넣었다. 먹어본 적 없지만 분명 맛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콩=다이어트 식품=다다익선. ‘이집트 콩’이라 적힌 생소한 것을 집어오는 딸을 보고 의아해했다. 나는 엄마, 아빠에게 요즘 유행이라는 슈퍼 푸드 이집트 콩(병아리콩)을 소개했다.
집에 오자마자 큰 볼에 콩을 가득 부어 하루 내 물에 담가 뒀다. 다음 날 두 배로 커진 병아리콩을 큰 냄비로 옮겨 담는다. 소금 간을 조금 하고 끓는 물에 팔팔 끓였다. 꽤 오랜 시간을 불 앞에 있었다. 골고루 익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먹어 보고 다른 것도 먹어 보고를 반복했다. 껍질이 몇 개씩 떠오르며 푹 삶아진 병아리콩들을 큰 대야로 옮겨 찬물에 담갔다. 노동의 시간이다. 멸치 똥을 떼던 엄마처럼 한쪽 다리를 접고 앉아 거실에서 병아리콩 껍질을 벗겼다. 다 벗긴 콩은 당장 먹을 양을 제외하고 통에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나머지는 기름 없이 프라이팬에 달달 볶았다. 올리고당과 설탕물로 코팅해야 했는데 죄책감에 (비정제 설탕에도 조심스러웠다) 소량만 뿌렸다. 노릇한 갈색빛을 띠어 불을 끄고 조금 식혀 줬다. 식은 병아리콩을 준비해 둔 통에 담아 설레는 마음으로 맛을 봤다. 뭘까… 어중간한 바삭함과 어중간한 단맛. 몇 시간을 고군분투 불 앞에 서 있던 시간, 목과 허리를 두들겨 가며 껍질을 벗기던 내 모습, 냉동실과 통에 아직 가득한 콩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나는 병아리콩과 이별했다.
우리가 재회하게 된 건 지중해식 샐러드를 처음 접했을 때다. 사 먹는 샐러드보다 직접 만들어 먹는 샐러드를 선호하지만 다른 샐러드 가게보다 특별해 보이는 구성에 마음이 갔다. ‘이 고소한 소스가 병아리콩이라고? 피카추 돈가스 맛이 나는 이 요물이 병아리콩이라고?’ 작은 미트볼처럼 보이는 것은 팔라펠(Falafel)이란 것이었다. 병아리콩을 갈아 둥글게 빚어 튀긴 음식이다. 되직한 소스는 중동 지역에서 즐겨 먹는 디핑소스, 후무스(Hummus)라는 것이었다. 그날 내 인생 두 번째 병아리콩을 구매했다.
후무스 만드는 법은 간단했다. 어김없이 병아리콩은 물에 하루 동안 불린다. 물 먹은 콩이 통통하게 커지면 삶을 차례다. 세월이 흐른 만큼 요령이 생겼으니 더는 불 앞에서 노심초사하지 않는다. 전기밥솥에 콩과 콩 높이 두 배의 물을 넣고 소금을 한 두 꼬집 넣어준 뒤 취사 버튼을 눌렀다. 할 일을 하다 밥솥에서 알림음이 들리면 끝이다. 삶은 물을 따로 빼두고 찬물에 병아리콩을 담근다. 콩을 꼬집으면 껍질이 훌렁 벗겨진다. 껍질은 그냥 먹어도 상관없지만 부드러운 식감을 위해 벗겨줬다. 곧, 병아리 암수를 구분하는 감별사처럼 이미 껍질을 벗긴 콩과 안 벗긴 콩을 구분해낸다. 설렁설렁 벗기다 보면 욕심이 생겨 결국 다 벗기게 된다. 병아리콩의 샛노란 색이 더욱 선명하다. 괜히 ‘병아리’ 콩이 아니다. 껍질은 둥둥 떠오르니 그것만 건져 주면 된다. 믹서기에 병아리콩 한 컵, 참깨 한 스푼, 레몬즙 한 스푼, 마늘 한 쪽, 올리브유 두 스푼. 마지막으로 소금 간 조금 넣고 병아리 삶은 물을 네다섯 스푼 넣고 갈아줬다. 묽은 정도를 보며 취향에 맞게 물을 더 넣어주면 된다. 다 갈려 완성된 후무스를 살짝 찍어 먹는다. 후회됐다. ‘더 많이 삶을걸’. 후무스는 생크림 펴듯 곱게 펴, 그 위에 올리브유 가득 부어 냉장 보관하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 후무스 위엔 보통 파프리카 가루를 뿌리지만 고춧가루(안 뿌려도 무관하다)로 대체했다. 완성된 후무스는 바게트나 깜빠뉴에 발라 통후추만 뿌려 먹어도 되고, 샌드위치에 소스처럼 발라 넣어줘도 풍미가 좋다. 약간의 짠 기가 콩만이 내는 고소함을 배로 만든다.
이미 한 번의 이별 경험이 있던 병아리콩은 돌고 돌아 나에게 왔다. 멋있고 맛있는 모습으로 돌아오니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여 년 전 다이어트하며 접한 병아리콩은 간식의 선택지가 없던, ‘이거라도 먹어야지’의 ‘이거’ 일뿐이었다. 병아리콩은 빵과 과자를 대체하지 못하며, 빵과 과자도 병아리콩을 대체하지 못한다. 무언가의 대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준다면 부족함이 없다. 나는 닭띠니까 내 자식처럼 품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