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몇 가지의 음식이 있다. 그중 하나는 프랑스 니스 여행 중 먹은 ‘구운 채소’다. 니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직행 후, 짐도 안 풀고 전망대를 향해 달렸다. 니스에서 첫날을 기념하는 일몰을 보기 위해서다. 생각보다 높은 전망대에 숨 헐떡이며 올라가는데 해는 무심히도 내려가고 있었다. 더욱 힘주어 올랐지만 끝없는 돌계단에 하산하는 사람들이 부러워질 때쯤, 또래로 보이는 한국인 여성을 마주쳤다. 그때 우리 옆엔 작열하던 태양이 붉게 타오르며 장렬히 전사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역시 동포는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죄송한데 안 급하시면 제 사진 좀 찍어주세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열심히 자세를 취해가며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저녁 식사를 같이하기로 했다.
해는 졌지만, 어둠이 내리지 않은 시간, 그녀와 니스 유명 레스토랑 앞에서 재회했다. 정식으로 짧게 인사를 나누고 들어가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날은 레스토랑의 휴무일이었다. 아쉬운 대로 급하게 다른 레스토랑을 찾아야 했다. 갈 곳 잃은 둘은 길거리에서 핸드폰만 같이 들여다보며 검색을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저녁 약속이었던지라 대부분 레스토랑은 예약이 꽉 차서 갈 수 없었다. 핸드폰을 넣어두고 우리는 직접 나서 찾기 시작했다. 포기할 때쯤 사람이 가득 찬 작은 레스토랑을 발견했다. 평점이나 리뷰를 보고 가려낼 처지가 아니었다. 문 열고 들어가 ‘예약을 못 했는데 지금 식사가 가능한지’ 물었다. 운 좋게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인생 음식을 맛볼, 완벽한 서사 아닌가?)
레스토랑 이름은 ‘LES GARÇONS‘. 코스요리(entrée, plat, dessert)를 29.90유로에 먹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나온 요리가 바로 ‘구운 야채’였다. 옆에 자리한 파릇한 야채 믹스도 과하지 않은 드레싱이 입맛 돋우기 좋았다. 구운 파프리카, 가지, 주키니 호박 위엔 통으로 구운 방울토마토. (그 아래 깔린 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말도 안 되는 맛이었다. 원래 익힌 야채를 좋아하는 편이다. 소고기 뭇국의 무, 감자탕의 우거지, 닭갈비에 들어간 양배추, 떡볶이의 양배추, 찜닭의 양파와 대파, 짜장의 양파. 그런데 ‘양념과 같이 곁들여야 맛있는 게 아니었나?’ 뒤이어 큼지막한 스테이크와 구운 감자, 디저트로 나온 크림 브륄레(crème brûlée)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용두사미는 아니지만, 나에겐 구운 야채가 용두(용의 머리)로 남아 버렸다.
저 날 이후 종종 구운 채소가 땅기는 날이 있었다. 그리움을 품고 가지와 애호박을 구매했다. 이제 두 개의 도깨비방망이가 생겼으니 야심 차게 요리를 시작한다. 가지와 애호박은 너무 얇지 않게 길게 잘라주고 줄 세워 소금 친다. 조금 두면 채소에서 물이 나오니 키친 타올로 눌러가며 닦아준다. 그다음, 프라이팬에 오일을 살짝 두르고 줄 세워 구워준다. 파프리카도 볶아 넣어줘도 좋지만, 나는 구비된 양파를 채 썰어 같이 구워줬다. 그 옆에 냉동 보관해 둔 치아바타도 뒤집어가며 굽는다. 구워진 치아바타는 한쪽에 바질 페스토를 발라 준다. 그리고 잘 구워진 야채를 차곡히 쌓아 넣고 빵 뚜껑을 덮으면 된다. 샌드위치를 프라이팬에 통으로 올려 뒤집으며 꾹 눌러가며 구워주거나 무거운 그릴을 올려주면 ‘구운 야채 파니니’가 된다.
샌드위치를 사랑하는 내가 처음 맛 본 ‘구운 야채’ 샌드위치. 한 입 베어 물면 잘 구워진 치아바타의 바삭한 소리가 먼저 들린다. 바질 페스토는 짠맛을, 잘 구워져 본연의 맛을 내는 야채는 단맛을 낸다. 건강한 단짠 요리다. 맛있다고 아무리 외쳐도 외면당할 것만 같은 초라한 재료와 행색이지만 어떤 거로도 대체할 수 없는 맛이다. 야채를 싫어하는 친구에게 꼭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쉬운 마지막 한입을 먹었다.
속상하지만, 아무리 채소를 구워내도 그날의 맛을 재현해내진 못할 것이다. 타국의 레스토랑에서 접한 생소한 음식, 따뜻한 조명 아래 먹음직한 색감의 음식, 포크와 나이프가 식기에 부딪히는 소리, 와인잔을 서로 맞대는 소리, 알아들을 순 없지만 기분 좋은 대화 소리, 하지만 우리와 같은 웃음소리. 니스에서의 저녁 식사는 놀라움에서 그리움으로 남아버린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