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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외의 Jan 03. 2022

나방씨



능력 있는 나방씨에게 죄가 있다면, 능력만 있다는 죄. 여자들은 기막힌 촉으로 알아봤다. 덕분에 나방씨는 연애 대신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유망한 벤처기업 대표 자리에 올랐다. 타의로 비혼주의자가 되었지만, 고군분투 투병 중인 어머니를 위한 효도를 목적하에, 어머니가 건넨 여성의 정보와 장소 일시가 적힌 쪽지를 받는다. 맞선 당일, 나방씨는 급하게 차에서 내려 발렛을 맡겼다. 호텔 라운지 카페에 홀로 앉아 있는 그녀가 보인다. 나방씨는 생각보다 미팅이 길어졌다며 사과했다. 그녀는 ‘정말’ 괜찮은 미소로 보답한다. 나방씨는 횡설수설하다 결국 군대 얘기까지 나왔다. 멈춰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인지했지만, 입이 멈추지 않았다. 여태 만났던 맞선 상대는 의자 등받이에서 떨어져 있던 몸이 점점 뒤로 가던데,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질문을 이어갔다. 개떡같이 말해도 그녀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센스 있게 받아쳤다. “사실…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여성분은 처음입니다” 나방씨의 말에, 그녀는 대답 대신, 나방씨 앞에 차갑게 식어 방치 중인 커피에 눈짓하고는 싱그럽게 웃는다. 그 순간 그녀에게서 빛을 본 나방씨는 느낌이 왔다. 본인 앞에 앉아있는 그녀와 결혼하게 될 것을.


나방씨가 허투루 대표 자리를 꿰찬 건 아니었다. 남다른 추진력으로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그녀 뜻대로 허례허식 결혼식을 생략하고 소박하게 제주도에서 둘만의 식을 올리기로 한다. 사실 그녀는 바쁜 나방씨를 위해 해외 말고 제주도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눈치 없는 나방씨는 그녀가 정말 제주도를 가고 싶어 하는 줄 안다.


돌하르방과 야자수. 낯선 것들이 가득한 제주도를 만끽하며 둘은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문을 열자마자 큰 액자 같은 통유리창에 바다가 보인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 창문에 딱 달라붙어 구경했다. 반면에 나방씨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다. 오늘 준비한 깜짝 프러포즈에 온 신경이 쏠려있다. 숙소도 프러포즈를 위해 호텔 대신 친구의 별장을 빌렸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방씨 시선이 자꾸 행거 쪽으로 향했고, 거기 걸려 있는 점퍼 주머니는 과하게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반지 케이스 크기였다. 그녀는 나방씨가 마냥 귀여웠다.


짐 정리를 하고 주변을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흘렀다. 거짓말에 젬병인 나방씨는 어떻게 둘러대고 그녀 몰래 준비를 할지 고심했다. “피곤해서 한숨 자야겠어요.” 그와 달리 그녀는 센스 있었다. 알 리가 없는 나방씨는 ‘하늘이 도왔다’ 생각하며 조용히 숙소 앞마당으로 간다. 문에서부터 작은 초로 길을 만들고 끝엔 하트 모양으로 장식한다. 제주도 바닷바람 탓에 촛불이 자꾸 꺼져 애먹었지만, 마지막 초까지 불붙이는 데 성공했다. 완전히 캄캄해진 마당에서 나방씨가 하트 안으로 들어간다. 점퍼 주머니 속 반지 케이스를 꺼내 열고, 무릎을 꿇는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나와보라 소리친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방금 깬 척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두 눈을 과하게 크게 뜨고 감동한 표정을 짓는다. 촛불 길을 따라 하트 속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나의 빛이야.” 반지를 내밀며 나방씨가 말한다. 그녀는 나방씨를 일으켜 세웠고 그녀의 네 번 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진다. 서로의 손과 얼굴을 바라보다 그녀가 생각난 듯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찾는다. “여행 가방에서 찾아볼게요. 나방씨는 차에 있는지 좀 확인해줄래요?” 별장 차고에는 다른 차가 주차돼 있어, 언덕 아래 주차장까지 내려가야 했다. 나방씨는 한참 내려가 차 안을 뒤진다. 자동차 등을 켜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녀가 이미 찾았을까 봐 다시 언덕을 올랐다.


내려갈 때와 달리 어두운 언덕이 조금 밝다. 그리고 매캐한 냄새와 연기가 언덕 아래로 내려온다. 나방씨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가파른 언덕을 뛰어갔다. 마당에서부터 집안까지 불길이 치솟아 있고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안에서 카메라를 찾는 동안 불붙은 초 하나가 바람에 날려 엎어지고, 바비큐를 위해 준비해둔 기름 탓에 걷잡을 수 없게 불길이 퍼졌다. 나방씨는 고민할 새가 없었다. 옷 소매로 코와 입을 막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빛’을 찾아 ‘불’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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