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을 그만뒀다. 나는 도급 업체 소속으로 방송국에서 일했다. 3년이 됐을 무렵 내가 소속된 도급 업체가 방송국에서 정리되었다. 덩달아 나도 정리되었다. 물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굳이 다른 도급 업체로 옮기지 않았다. 이전부터 막연하게 서른 살이 되면 다른 회사를 다니고 싶었기 때문이다.
방송국에서는 디지털 뉴스 편집팀에서 일했다. 일하는 동안 부서 이름이 참 많이도 바뀌었지만 오래 불리던 이름이자 하는 일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름이다. 기자들이 쓴 기사를 교열하고 교정해서 인터넷에 업로드하는 일을 했다. 인터넷에서 보는 뉴스 기사는 전부 이런 과정을 거친다.
출근 마지막 날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오니 꽃 바구니가 내 책상 위에 있었다. 보낸 사람 이름은 없었지만 나는 누가 보낸 꽃인지 알 것 같았다. 다른 부서로 발령 난 이전 부장님 일터였다. 회상하자면, 나는 누구보다 호응을 잘하는 직원이었다. 시답잖은 아재개그에도 웃고, 못 할 것 같은 일에도 일단 “네!”를 외쳤다. 아재개그는 내 개그 코드와 맞았고 못 할 것 같은 일은 우선 하겠다고 말한 다음에 해보고 안 되면 그때 안 되는 이유를 말해도 늦지 않았다. 내가 못 한다고 해서 나에게 실망하는 부장님은 없었다. 그렇게 일을 했더니 나를 좋게 보는 부장님이 생겨났다. 그 부장님이 나의 퇴사 소식을 듣고 꽃 바구니를 준비해 주신 것이었다. 나는 그 꽃 바구니를 보며 허투루 회사를 다닌 건 아닌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겨울, 한아름 선물을 들고 퇴사했다.
일주일 후 나는 새로운 회사에 출근했다. 집과 정말 멀었던 회사는 내가 생각했던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계약서를 쓰기 전이었는데 엄마, 아빠 앞에서 울면서 출근하기 싫다고 말했다. 내 나이 서른 살에 세 살이나 하는 일을 했다. 나는 새로운 회사를 그만두고 실업 급여부터 신청했다. 진정한 백수가 된 것이다.
논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은 불편했지만 몸은 참 편했다. 솔직히 처음 몇 달은 실컷 놀았다. 방송국에선 스케줄 근무를 하는 탓에 남들 쉬는 날 쉬지 못했다. 실로 오랜만에 주말의 달콤함을 느꼈다. 그때는 기사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일도 금방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달이 지나고 면접을 볼수록 나는 자신감을 잃어갔다. 이 세상에 나를 원하는 회사는 한 군데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낙산공원을 올랐다. 이유는 단순했다. 집에서 가까웠다. 해질 무렵 낙산공원을 올라가면 정상에서 도착할 때쯤 노을과 함께 개미 같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생각 속을 거닐다 보면 밤이 찾아왔다. 다시 낙산공원 아래로 내려가면 네온사인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생기 넘치는 표정을 보며 내가 쓸모없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내 본다.
실업급여는 받을 수 있는 날짜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실업급여가 끊기기 한 달이 남은 시점이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나의 취업!’ 나는 그 여느 때보다 취업이라는 열의에 차 있었다.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고 면접 연락이 온 곳이 지금의 회사이다. 강남에 있는 영상 제작사. 강북에 20년 넘게 살며 강남으로 출퇴근하겠다는 생각은 살아생전 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영상 제작사는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단지 ‘스튜디오 관리’라는 단어를 보고 ‘할 일 별로 없겠는 걸?’이라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여기서 적당히 일하다 런(RUN)해야지. 그렇게 나는 면접을 보러 갔다.
나는 파워 J이다. 내일 할 일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나에겐 매일 계획을 짜는 일이 익숙하다. 지금의 회사를 다닐 때도 내 인생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징검다리가 되리라 생각했다. 내 인생 계획에 이 회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3년째 강남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역시 인생은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그게 바로 인생의 묘미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