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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un 11. 2021

상냥함이 필요할 때

하이디 Heidi : 하이디의 흰 빵


서랍 안에 가득 차 있던 흰 빵. 

그 모습은 단숨에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릴 적 ‘스위스’ 라는 나라를 처음 알게 된 건 『하이디』를 통해서였다. 통통한 뺨을 빨갛게 물들이고 산을 뛰어다니는 작은 소녀, 하이디. 스위스의 작가 요하나 슈피리 Johanna Spyri가 쓴 소설 속 주인공이다. 

나는 하이디를 책보다는 만화영화로 먼저 만났다. 일본의 후지 TV에서 해외 아동문학을 원작으로 만들었던 <세계명작 극장> 시리즈. 피아노 학원의 선생님들 중 누군가, 그 시리즈의 팬이었던 게 틀림없다. 아니면 나처럼, 피아노 치는 건 싫어하지만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 학원에 오는 아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가. 이 시리즈 덕분에, 나는 한동안 『하이디』의 원제를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로 알고 지냈다. 

만화영화 ‘하이디’에서 가장 내 시선을 끌었던 건, 음식이었다.  하이디가 할아버지와 함께 불에 치즈를 녹여 먹는 장면, 피터가 큰 빵을 우걱우걱 한 입에 먹어치우는 장면, 갓 짠 염소 젓이 담긴 컵을 하이디가 두 손으로 꼭 잡고 마시는 장면들. 보고 있노라면 꼴깍, 침이 넘어갔다.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면서, <세계명작 극장>과 나의 인연도 끝났다. 만화영화 ‘하이디’와도 작별이었다. 

어른이 된 후, 『하이디』가 다시 떠오른 것은 빵 때문이었다. 일본 여행 중 들린 빵집에 ‘하이디의 흰 빵’ 이라는 이름이 붙은 빵을 봤다. 하이디가 피터의 할머니를 위해 서랍 안에 차곡차곡 모아 두었던 빵. 그 빵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하이디』가 쓰였던 1880년, 밀가루는 정제하지 않은 호밀가루에 비해 상당히 비쌌다. 호밀로 만든 빵은 오래 보관이 가능했지만, 오래 보관할수록 딱딱해져 나이 많은 피터네 할머니에게는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그런 할머니를 위해 하이디가 모았던 흰 빵. 영문 번역판에는 ‘soft bread’라고 쓰여 있는 그 빵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빵집에서 사 온 ‘하이디의 흰 빵’을 뜯어먹으며, 호텔에 드러누워 검색을 시작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독일식 모닝빵, 브뢰첸(Brötchen). 풀이하자면 ‘작은 빵’이란 이름의 이 빵은 독일에서 식사 빵으로 흔히 먹는다. 하이디가 식사를 할 때마다 빵을 숨긴 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이 빵일 확률이 높다. 달걀과 버터를 넣지 않은 발효 빵으로, 보통 타원 모양을 한 이 빵은 흰밀, 통밀, 잡곡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다.

브뢰첸보다 좀 더 부드러운 빵으로는 부터촙프(Butterzopf)가 후보에 올라 있었다. 이름 그대로 풀면 ‘버터(Butter)로 만든 땋은 머리 모양(zopf)의 빵’이다. 작은 동그라미가 총총히 이어져 있는 모양새가 인상적이다. 스위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빵으로, 90%의 밀가루와 10%의 흰 스펠트 가루를 섞은 ’촙프 가루’로 만든다.  버터가 들어간 만큼 브뢰첸보다 훨씬 부드럽다. 

이외에도 하드 롤빵이나 버터 번 등이 후보로 언급되고 있었다. 독자적인 ‘하이디의 빵’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는 페이지도 꽤 있었다. 사실 ‘하이디의 흰 빵’은 어느 특정한 종류의 빵은 아니었을 것이다. 클라라의 집에서 한 달 내내 같은 빵을 먹지는 않았을 테니깐.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흰빵’의 정체를 궁금해 한 것은. 그 빵을 먹으면 하이디의 상냥함을 온 몸으로 흡수할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피터의 할머니에게 흰 빵을 가져다주겠다는 하이디의 마음.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담긴 빵. 하이디의 흰 빵을 먹으며, 누군가의 상냥함이 마음을 채워주기를 기대하며 상상하는 것이다. 그 마법 같은 빵은, 대체 무엇일까 하고. 



하이디의 상냥함. 

그것은 할머니를 위한 것임과 동시에 하이디를 버티게 해 주는 힘이기도 했다. 

하이디는 몰랐다. 클라라의 집,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것이 할아버지의 집을 완전히 떠난다는 의미인 것을. 짐을 챙겨 오라, 는 이모의 말에 하이디가 따라나섰던 것은 당연히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할아버지의 집, 산골짜기 아래 작은 통나무집은 이미 하이디의 진짜 ‘집’이 되어 있었으니깐. 

그렇기에 하이디는 클라라의 집에서 흰 빵을 모은다. ‘돌아갈 때’를 위해서. 그러나 서랍 안의 흰 빵은 점점 많아질 뿐이다. 하이디가 통나무집 창으로 봤던 밤하늘을 떠올리며 우는 날도 점점 길어진다. 어느 순간 하이디는 알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도 하이디는 흰 빵을 모은다. 순간 흰 빵은, 하이디의 상냥함은, 집으로 돌아갈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의 되어 하이디를 하이디로 있게 해 준다.

하이디와 클라라의 우정은 분명 아름답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하이디의 생활은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만화영화에서는 짧고 두리뭉실하게 표현되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하이디의 괴로운 날들이 꽤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여기에는 엄격한 미스 로텐마이어의 훈육 태도도 한몫을 거든다. 미스 로텐마이어는 아이들은 엄격하게 통제해야 한다는 당시의 교육이념을 그대로 사람으로 만든 듯한 인물이다. 그녀는 하이디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우는 것을 잘못이라 말한다. 그래서 하이디는 울지 못하는 아이가 된다. 하이디가 고향에 가지고 돌아온 흰 빵 열두 개는, 그 모진 향수병을 이겨낸 증거인 것이다. 

소설 속, 하이디의 향수병에 대한 묘사는 무척이나 섬세하다. 그런 하이디의 모습에, 작가인 슈피리가 언뜻 겹쳐 보인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다 결혼 후 도시로 이주하게 된 슈피리는 오랜 시간,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피리는 그럼에도 상냥함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이디가 서랍 안에 흰 빵을 하나씩 모으며 견디어냈듯이, 한 글자씩 글을 써내려가고 있었을 슈피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상냥함이 필요한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하이디와, 하이디의 흰 빵을 생각한다. 희고 말랑한 빵을 사서,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어딘가에 앉아 빵을 베어 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내내 할머니에게 줄 빵 바구니를 꼭 안고 있었던 하이디를 떠올려 본다. 그 빵에 담긴 상냥함을 몸 안에 밀어 넣는다. 

그러면  문득 생각하게 된다. 상냥함을 꼭 끌어안고 살아가고 싶다고. 

그것은 언젠가, 타인만이 아닌 나 자신을 지탱해 줄 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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