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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Mar 05. 2022

일상을 바꾸고 싶어질 때

바베트의 만찬 Babette's Feast : 바바 오 럼


친구가 내게 깜짝 발표를 했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고. 다섯 번 만나면 두 번쯤은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로 안부 인사를 대신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날의 선언은 달랐다.’ 그만두겠노라’가 아닌, ‘그만두었다’이었다. 나는 잠시간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입을 열기 전, 친구가 선수를 쳤다.

“하지 마. 지금 하려는 말.”

어쩌려고 그래, 하던 말이 급히 내 목 아래로 가라앉았다. 친구는 그 말을 너무나도 많이 들었다고, 적어도 한 명 정도에게는 듣지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친구가 퇴사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이유.

밥 때문이었다.

친구네 회사는 백반집 두 곳에서 돌려가며 점심밥을 주문해 먹었다. 맛없는 곳과 맛있는 곳. 맛있는 곳이 문을 닫았고, 친구는 김치찌개와 김치볶음만을 번갈아 먹다가 다른 식당에서 주문해 먹자는 제안을 했고, 팀장은 친구의 제안을 가볍게 무시했다. 돈 아까운 줄 모르고, 하는 면박과 함께. 친구는 딱 한 달이 되던 날, 점심시간에 회사를 나가 혼자 보쌈 정식을 시켜먹으며 결심했다.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바베트가 열었던 만찬이 떠올랐다. 

『바베트의 만찬』은 덴마크의 작가 카렌 디네센이 쓴 소설이다.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 베를레보레. 청교도 교리에 따라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목사의 딸인 마르티네와 필리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교리를 지키기 위해 젊은 시절, 운명적으로 다가왔던 사랑마저 떠나보낸다. 목사가 세상을 떠나고, 몇 안 되는 마을 사람들은 습관적인 일상을 반복하며 서로 고인 감정을 드러내지도, 털어내지도 못하고 곪아간다. 

바베트의 만찬이 있기 전까지는.

파리 최고의 레스토랑인 ‘앙글레’의 수석 조리장으로 일했던 바베트. 그녀는 프랑스에 혁명이 일어나자 노르웨이행을 택한다. 그곳에서 마르티네와 필리파 자매를 만나고, 그녀들의 집에 머물며 가정 일을 돕는다. 그리고 복권으로 만 프랑을 얻게 되었을 때, 자매에게 청한다.

만찬을, 사람들 모두를 초대해 만찬을 열게 해 달라고.

이 별 것 아닌 부탁을 수락하는 건, 자매들에게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검소하지 않은 식사를 한다는 건, 자매가 평생 동안 지켜 온 청교도적 생활습관을 어기는 일이었으니깐. 그럼에도 자매는 바베트의 청을 받아들인다. 바베트의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기에 말이다. 대신 자매는 만찬 참가자들과 비밀스러운 약속을 한다. 어떠한 음식이 나와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기로 말이다.

그러나 만찬이 진행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러운 탄성이 터져 나온다. 그 탄성은 메인 요리인 ‘카이유 엉 사코파쥬 Caille en sarcophagi’가 나왔을 때 절정에 달하게 된다. 바베트가 고안해 낸 이 요리는 메추리의 뱃속에 송로버섯과 거위 간을 채워 넣은 뒤, 메추리를 빵으로 감싸 오븐에 넣고 구워낸 요리이다. 

그때부터 긴장은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평온함이 식탁에 흐르게 된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표현하지 못했던 미소를 서로 나눈다. 마을 사람들의 표정을 지배하고 있던 무기력함은 음식이 주는 즐거움에 점차 누그러든다. 

바베트가 만찬의 마무리로 선택한 케이크는 바바 오 럼 Baba au Rhum이다. 시폰 케이크에 럼을 넣은 달콤한 시럽을 뿌린 케이크. 이 케이크는 알자스 지방에서 만들어졌다. 알자스 낭시 지역의 왕이자, 루이 15세의 장인이었던  스타니슬라스 레슈친스키 Stanislas Leszczynski. 그는 과자와 빵, 디저트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루이 15세에게 딸을 시집보낼 때 파티셰를 함께 보낼 정도로 말이다. 그가 루이 15세에게 보낸 파티셰로 인해 바바 오 럼은 프랑스 귀족들이 즐기는 디저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알자스는 프랑스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독일과도 국경을 맞대고 있다. 라인 강과 보주 산맥 사이에 있어 기후가 온화하고, 와인을 비롯하여 농산물이 풍부하다. 또한 석탄 등의 자원 매장량도 풍부하며 라틴문화와 게르만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아 중세 건축 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동화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나는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알자스 지역을 알았다.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되는 도시가, 알자스의 도시인 콜마르였던 것이다.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공존하는 건물들과 운하, 길게 이파리를 드리운 나무들과 돌길까지. 평온함이 햇살처럼 반짝이는 풍경은 여행자의 마음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알자스의 역사는 풍경처럼 평온하지만은 않다. 지리적 특징 때문에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끼어 역사적인 곤욕을 치러 내야 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알자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소설에서 보이듯 알자스의 주민들은 때로는 안전을, 때로는 국민적 정체성을 위협받아야 했다. 





이러한 알자스에서 만들어진 바바 오 럼이 만찬의 끝을 장시간 것은, 그렇기에 상징적이다. 바베트에 대해 알게 되면 더욱 그렇다. 그녀는 시민군의 지지자이지만, 왕실을 위해 일했다. 왕정에 반대했으나, 그녀는 자신의 주 고객이었던 귀족들과 친구였고, 친구들이 모두 처형당할 때까지 꿋꿋이 파리를 지켰다. 그렇기에 그녀는 노르웨이까지 가야만 했다. 왕정파와 시민파, 어느 쪽에도 온전하게 속할 수 없었기에.  

그 모순적인 삶. 

그녀가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매가 바베트를 걱정하며 말을 건넸을 때, 바베트는 당당하게 답한다.

“저는 위대한 예술가예요. 예술가가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것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날 내버려 둬 달라는 외침뿐이랍니다.”

내 친구는 언젠가,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









경쾌하지만 진지한, 동시에 사랑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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