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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Jan 28. 2022

나를 긍정하는 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Pippi Longstocking : 페파카코르

삐죽빼죽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 짝짝이로 신은 양말.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옷과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아이. 자신을 인도의 왕이 된 해적의 딸이라 말하는 아이. 스케치북 안에 말을 그리라는 교사의 말에 이렇게 대답하는 아이.

“내 말은 너무 커서 이렇게 작은 데에는 다 그릴 수 없단 말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원할 때면 언제든 하트 모양 과자를 잔뜩 구울 수 있는 아이.

삐삐 롱스타킹.

삐삐의 고향, 스웨덴을 포함한 북유럽 국가에서는 12월 13일이 되면 ‘성 루시아 데이’ 축제가 열린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축제이자, 빛의 성녀 루시아를 기념하는 행사다. 12월 13일은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던 때의 기준으로 일 년 중 해의 길이가 가장 짧은 날이다. 가장 어두운 날이 ‘빛의 성녀’의 기념일로 지정된 것은 사람들의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이 춥고 긴 북유럽이다. 춥고 길고 어두운 겨울날, 홀연히 나타난 빛의 성녀가 주변을 따뜻하고 밝게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바람.

어둡기에 빛을 바라는 것처럼, 자유롭지 못했기에 자유로운 삐삐를 동경했다. 

이야기 속, 삐삐가 굽는 과자는 페파카코르 Pepparkakor 이다. 영어로는 페퍼 쿠키, 후추 쿠키로 번역되지만 실제로 후추가 들어가지는 않는다. 이름에 후추가 들어간 이유는 과자가 구워진 색이 후추 색과 닮아서, 그뿐이다. 어이없는 이유 같지만, 실상 여기에는 후추에 대한 강한 동경이 숨겨져 있다. 

15세기 아프리카에서의 재배가 성공하기 전까지 후추는 ‘보석보다 귀한 향신료’이었다. 귀족들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후추를 술에 넣어 먹기도 했다. 후추를 관리하는 하인을 따로 두기도 했다. 귀한 후추를 미리 갈아두었다가 향이 날아가서는 안 되기에, 요리를 할 때에는 반드시 즉석에서, 딱 필요한 양만큼을 갈아서 쓰도록 했다. 그런 상황이니, 세금 내기도 버거운 평민들, 혹은 그만한 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후추는 그야말로 환상의 향신료일 수밖에 없었다. 후추의 맛을 상상하며 맛보았을 후추 과자. 실제로는 생강과 계피를 섞어 만든다.


어릴 적에는 어른이 되면, 삐삐처럼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고 모두 삐삐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태생부터 삐삐와 쌍둥이인 듯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는 친구를 볼 때마다,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좋아하는 일을 하겠노라 선포한 동료를 볼 때마다 묘한 자괴감에 빠지게 되었다. 왜 나는 저렇게 살지 못하지, 하고. 이른바 ‘욜로’ 열풍이 불 때에 그 자괴감은 더욱 심해졌다. 인생은 한 번 뿐이니 즐겨라, 는 말이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한 번 뿐이니 즐겨야 하는 삶을, 넌 왜 즐기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니, 하고. 

동경하는 일에 도전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궁색함.

그것은 누구든 한 번은 느껴본 적 있는 감정일 것이다.

무언가에 대한 ‘동경’ 이, 자신의 성향과 반대되는 쪽에 위치하면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빈도는 잦아질 수밖에 없다. 집순이 성향의 사람이 적어도 두 개의 모임에는 참여하겠다고 다짐할 때, 책만 봐도 졸린데 한 달에 한 권은 꼭 읽고 말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 혼자 여행을 꿈꾸지만 도저히 혼자 떠날 용기가 나지 않을 때. 자신의 성향이 확고하면 확고할수록, 반대쪽 성향에 있는 동경은 이루기 힘들다. 모임에 참여하다 결국 포기하고 집에 다시 틀어박힌 순간, 책꽂이의 책이 석 달 넘도록 딱 한 권일 때, 여행 계획은 다 세웠지만 도저히 비행기 표는 사지 못하는 순간. 스스로의 용기 없음이 궁색해진다.

그 순간의 궁색함이 자책으로 이어지고, 자신에 대한 미움이 되어버린다면.



삐삐가 될 수 없는 자신을 탓하다 문득 생각했다. 삐삐처럼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내 모습도, 어쨌든 나인데 왜 탓을 해야 하는가 하고. 집순이로 산다고, 책을 읽지 않는다고, 혼자 여행을 떠나지 못한다고, 회사를 그만두거나 꿈을 좇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을 미워하기까지 해야 할 일일까. 그 미움은 실상, 다른 사람들이 외치는 말들에 휩쓸려 생겨나 버린 것은 아닐까.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지적인 공동체적 삶’ 이 근사하다 외쳤기에 그 중 하나쯤은 이루어야 한다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품었던 동경은 과연, 진짜 내 동경이었을까.

만약 삐삐였다면, 마음대로 살 수 없다고 해서 자신을 미워하고 탓했을까. 아니었을 것 같다. 삐삐의‘마음대로’의 원천은 자기애니깐. 삐삐는 자신이 얌전해지지 못할 것임을 알고, 그래서 미움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다. 그리고 자신을 티파티에서 내쫓는 세테르그렌 부인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난 얌전해지기는 틀렸나 봐요.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걸요. 절대 얌전해지지 못할 거예요.”

애를 써 봤다는 것에서, 삐삐가 얌전해지는 것에 어느 정도 ‘동경’ 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삐삐는 알고 있었다. 그 ‘동경’은 자신의 성향과 정반대에 있기에 결코 이루지 못할 것임을. 그리고 그 사실을 긍정하고, 본래의 자신의 성향을 떳떳이 밝힌다.

그러니깐 삐삐처럼 사는 건.

내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긍정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페파카코르는 원래 ‘성 루시아 데이’ 때에 먹는 과자였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은 스웨덴의 국민 과자가 되었다. 12월뿐만 아니라 사시사철, 스웨덴의 슈퍼마켓에서도 만날 수 있다. 스웨덴 여행을 갔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사보았을 빨간 케이스의 브랜드 과자. 그것이 바로 페파카코르이다.

진짜 후추 과자가 되지 못했지만 그 맛 그대로 사랑받고 있는 페파카코르.

삐삐처럼, 따뜻한 우유에 페페카코르 하나를 베어 물어본다.

이대로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하고 생각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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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귤한 표지의 단편집!! 

찬바람 불 때 따뜻한 이불 안에서 귤 까먹으며 읽어도 딱 어울리는 책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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