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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Mar 26. 2022

나만을 위한 처방

환상 도서관 THE LIBRARY : 체리파이

이별한 직후 친구가 말했다. 지옥에 있는 것 같아,라고.

때때로 자기 스스로를 지옥에 몰아넣을 때가 있다. 너무나 마음이 괴로운데,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때. 자기 탓으로 상황이 어그러진 게 아닌 것을 아는데도 스스로를 탓하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 일상은 지옥이 된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지옥을 소개하고자 한다.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판사. 그는 지옥에 온 사람들에게 처방을 내린다. 지옥에 온 사람들을 좀 더 나은 사람들로 만들기 위한, 독서 처방을. 난폭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전원시를 읽는 처방을 내리는 식이다. 감옥에 온 사람들이 받는 벌은 그것뿐이다. 영원한 독서. 그들은 고문당하지도 않고, 썩 괜찮은 시설에서 식사를 즐기며, 계속 책을 읽기만 하면 된다. 더군다나 그 지옥의 현 거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디저트도 맛있다고 한다. 특히 체리파이가. 이 지옥의 이야기가 쓰인 종이를 통째로 씹어 삼킨 사람의 이야기이니, 믿을 만하다.

이 도서관을 만들어낸 사람은 조란 지브코비치. 유고슬라비아(현 세르비아) 출신의 작가이다. 그는 1999년, 봄 베오그라드에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1991년부터 2000년도 초까지 이어진 발칸 반도 곳곳에서 수차례에 걸쳐 일어난 전쟁을 일컫는다. 처음에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 이탈을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어 내전의 성격을 지녔으나, 1992년 연방이 해체된 후의 전쟁은 민족적 대결 구도를 띄게 되었다. 이 전쟁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최악의 전쟁으로 평가되는 것은 인종주의적 이유로 대량의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으며, 그에 대해 국제사회의 방관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1999년, NATO는 코소보 전쟁에 개입을 시도한다. NATO는 세르비아군의 철수를 주장하며 78일간 베오그란드에 폭격을 퍼부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역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조란 지브코비치는 그 경험에 대해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저는 될 수 있는 한 1999년의 봄을 기억의 창고에서 없애려 애쓰고 있습니다. 두려움. 분노. 좌절감. 절망. 폐허. 길거리에 있는 시쳇더미들…. 눈에 보이지 않는 몇 가지 상흔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조란 지브코비치에게는 전쟁의 경험이 곧 지옥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소설을 출판하기를 열망했지만,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소설을 써 달라는 미국 출판사의 제의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전쟁 중 끊임없이 글을 썼는데, 대부분이 익살스럽고 유머 있는 글들이었다. 조란 지브코비치는 말한다. 웃음이야말로 자신을 지키는 길이며, 죽음으로부터의 마지막 피난처였다고.

그렇기에 조란 지브코비치가 그려낸 지옥은, 오히려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처방으로 내려주는 곳이 된 것이 아닐까. 독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형벌일 수 있지만, 소설을 쓰는 작가 본인에게는 더없는 행복을 형벌로 주는 곳. 그런 곳이 지옥이라 생각하면, 편한 마음으로 지옥으로 향할 수 있을 테니깐.

이 지옥에서는 내게 어떤 책을 처방전으로 내려줄까, 상상해본다. 지옥에 있는 듯 느껴지는 동안은 그동안 읽지 않았던, 새로운 분야의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익숙한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책들.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새로운 책들과 친해지려 애쓰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갈 것이다.

그때에 곁들여 먹을 체리파이도 낯선 것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

조란 지브코비치의 고향, 세르비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에는 유럽식 체리파이와는 다른 발칸 식 체리파이가 전통으로 내려온다. 동그란 파이 틀에 넣고 구운 것이 아닌, 크레이프처럼 얇게 편 반죽에 체리 리퀴드 소스와 절인 체리를 넣고 말아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Pita sa visnjams 라고 부른다. 여기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스콥 곁들여 먹는다. 집에서 얼추 흉내 내려면 핫케이크를 얇게 구워 체리나 딸기 잼을 넣고 말아도 그럭저럭 분위기가 난다.

달콤한 디저트, 그리고 책과 함께 하는 지옥.

그런 지옥이라면, 당분간 여행처럼 떠나 있어도 좋을 일이다. (*) 














경쾌하지만 진지한, 동시에 사랑스러운.

10대의 청춘 그 자체인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21982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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