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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Feb 20. 2016

하퍼 리.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의 부고


하퍼 리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

 2016년 2월 20일. 토요일이었다. 아침에 커피를 움켜쥐고 일을 하다 기사를 봤다. 미국 현지 시간으로 18일,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하퍼 리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였다. 너무나 늦게 알게 된 별고에 잠시 눈을 감았다. 여사님. 안녕히 가세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하지만 너무나도 좋아하던 소설을 쓴 여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가슴이 술렁였지만, 그래도 평온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였다. 점심을 먹다 컥, 사례가 걸릴  뻔했다. 습관적으로 들여다본 SNS에 리트윗 되어 온 기사 때문이었다. 움베르토 에코 별세.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황급히 기사를 클릭했다. 하퍼 리의 별고 기사를 봤을 때와는 다르게, 링크를 누르는 손은 다급했다. 19일 저녁, 움베르토 에코가 이탈리아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기사 내용을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 

 왜였을까. 한날에 알게 된 두 작가의 죽음이, 무척이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건.



하퍼 리보다 움베르토 에코를 더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장미의 이름』이 내게  뒤통수치는 충격을 선사했다면, 『앵무새 죽이기』는 충격과 슬픔을 함께 안겨준 소설이었다. 두 작가 중 누구를 더 존경합니까, 그런 질문을 받으면 망설임 없이 하퍼 리를 꼽았을 나다.  지난해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작인 『파수꾼』이 출판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하루 종일 싱글벙글 웃고 다녀 주변에서 뭔 일이 있냐는 말조차 들었던 터다. 나는 적나라하게 하퍼 리의 글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도 움베르토 에코의 죽음이 더 충격으로 다가온 이유는 대체 뭘까.

 밥을 먹는 내내 왜인가 싶었다. 밥을 뜨는 숟가락이 점점 느려졌다. 순간적으로 찾아왔던,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감정의 홍수는 그만큼 버거웠다. 그렇게 밥을 채 반도 비우지 못한 채 점심을 마친 뒤에야 이유를 한 가지, 떠올렸다.

 움베르토 에코가  여든아홉 세라는 것.

 나는 그 사실 자체에 깜짝 놀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움베르토 에코는 그런 작가였다. 글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가끔은 그가 정말 중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인가 싶었고, 어떤 때에는 21세기를 벗어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한 번도, 움베르토 에코의 나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당연히 언제까지고 지구 어딘가에 살면서 글을 쓰는 작가. 내게 움베르토 에코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퍼 리의 죽음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녀의 작품 때문이었다. 『앵무새 길들이기』는 미국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다. 그 시대를 겪은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담담한, 그러면서도 슬픈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싶은 에피소드들로 엮어져 있다. 그래서 처음 책을 읽었을 때부터, 내 안에서 하퍼 리는 이미 ‘여사님’ 이었다. 할머니와도 같은 친숙함과 존경스러움. 그리고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할 고통스러운 시대의 목격자. 그러한 현실감이 하퍼 리의 소설에는  넘쳐흘렀다.



작가는 작품으로 자신을 말한다. 그렇기에 독자는 때로 현실의 작가를 잊어버린다. 

 그들 역시, 보통의 인간으로 숨을 쉬며 살아간다는 것을.

 그 현실을 깨닫는 날이 적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이 언제까지고, 지구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고 내내 착각하며 산다면 그걸로 좋다.

 하루에 두 작가의 부고를 들은 날, 그런 생각으로 약간 우울해졌다. 






유진 [타랑]

Blog : http://blog.naver.com/hik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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