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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Sep 01. 2016

처음 방콕: 4. 우리의 기억은 향기로 이어져 있어

일곱날 일곱가지 이야기. 첫날, 길 헤메기 DAY 1-3




 부탁을 받았다. 카르멧 카멧에 가 달라고.

 한명은 아로마 제품을 사다 달라고 했고, 한 명은 구름을 맛보고 오라고 했다. 무엇을 사다 달라는 부탁은 웬만해서는 거절하는 편이다. 하지만 가끔, 이 부탁이라면 괜찮겠다 싶어 덥석 받아들게 될 때도 있다.

 카르마 카멧에서 쇼핑을 부탁한 친구는 나와 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탁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었다. 구름을 맛보고 오라 한 친구는, 그 말 만큼이나 달콤한 사랑스러움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방콕에서의 첫 날, 유일한 일정으로 카르메 카멧을 집어넣었다.

나는 원래 향제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다. 자연에 잘 스며들어 있는 향을 왜 억지로 꺼내 섞어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향수에는 특히 부정적이었다. 매일 향수를 들이붓고 오는 동료때문에 하루하루 조금씩 더 싫어졌던 것도 같다. 

 어느 날 늦은 밤이었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지만 버스를 타야만 했다. 막차였으니깐. 버스에는 술과 온갖 안주들이 뒤섞인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울렁거림이 심해졌다. 손을 마스크처럼 만들어 코를 덮어도 소용없었다.

 진짜 내려야하나, 싶을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청량감 넘치는 향이 냄새를 뚫고 들어왔다. 옆에 와 앉은 여자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은은하면서도 시원한 향. 그 향은 신기하리만치 속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 향은 뭐였을까. 화장품 가게의 향수 코너를 지나다 킁킁, 냄새를 맡게 되었다. 아로마 숍에 들려 물어보기도 했다. 이런저런 아로마 향을 테스트 해 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해도 그 향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때 맡은 거랑 꼭 같은 향은 못 찾을 걸. 향이란게 그래. 그 향이 퍼졌을 때의 공간과 공기, 향을 맡은 사람의 상태. 그 모든 게 향을 변화시키거든.”

 그렇게 말하는 친구는 살짝, 연금술사처럼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부정이 긍정으로 돌아선 것은.



 연금술사의 저택.

 카르마 카멧에 도착해 떠올린 것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소쿠리, 쌓아 올려진 나무 상자들, 곳곳에 매달린 말린꽃들.

 연금술사들의 시대는 사라졌다. 이젠 누구도 불로불사도, 금으로 바뀌는 먼지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 과학은 이성만큼의 상상을 앗아갔다.

 그에 비해 조향사들은 살아남았다. 사람의 후각. 과학은 그 미묘한 감각을 정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조향사는 현대의 연금술사라 일컬어진다.

 확실한 정체 없는 것을 쫓는 존재들. 향에 관심이 없다 해도 그 기묘한 매력을 거부하기란 힘든 일이다. 카르마 카멧의 인테리어 디자이너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장 자크 루소는 말했다. 냄새는 맡을 때보다는, 그를 통해 무언가 예감할 수 있을 때 상상의 세계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이다. 이러한 향기의 예감은 때로 비극적인 역사와도 맞닿는다. 엘리자베스 드 페도의 『향수의 기억』에서 마리 앙투와네트는 그의 조향사, 파르종이 만든 향수를 통해 자신의 비극을 예감한다.

 이러한 예감은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찾아온다. 여름 아침의 출근길, 문득 공기 중 비 냄새를 맡았을 때를 떠올려 본다. 오늘 오후부터는 비가 오려나. 한풀 꺾일 더위를 예감하면 문득 기분이 좋아진다. 창문을 때릴 빗방울과 비 아래 젓어들어갈 거리를 상상하게 된다. 하루의 시작이 시원해진다. 향수를 고를 때 그 기억을 닮은 향이 있다면 집어 들게 될 터다.



 카르마 카멧 다이닝 바에 앉았다. 컵받침 아래 편지가 함께  놓였다. 편지 봉투에는 소인까지 제대로 찍혀 있었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흔히 보냈을 법한 일상의 안부를 묻는 편지였다.

 그렇게 우아한 편지지에 쓰인 편지는 받아 본 적이 없다. 편지를 받는데도 그걸 식탁에 놓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럼에도 덜컥, 상대도 없는 그리움이 생겨났다.

 손편지의 힘이다. 친구들끼리 몰래 주고받던 쪽지와, 식탁 위 편지의 기억은 이어져 있다. 멋들어진 소인 대신 장난스러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해도 그렇다.

 다른 것은 냄새다. 친구가 건네주었던 쪽지에서는 우유와 땀 냄새가 났다.  카르마 카멧의 식탁 위 편지에서는 은은한 라벤더 향이 났다.

 카르마 카멧은 짜뚜짝 시장에서 시작된 아로마 숍이었다. 작았던 가게가 마니아 층을 늘려 도시 한복판에 다이닝 바를 겸한 숍을 냈다, 에브리데이 카페라는 캐주얼한 브랜드도 런칭했다. 말 그대로 성공신화다. 물론 질 좋은 제품이 성공의 베이스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베이스 위에 성을 지어낸 것은, 향의 본질을 파악한 브랜드의 콘셉트화가 아니었을까. 약간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컨셉화 된 인테리어는 그 결과물일터다.

 친구가 맛보고 오라던 구름은 솜사탕이었다. strawberry in the cloud. 파스텔 색감의 커다란 솜사탕 아래 컵이 숨어 있었다. 달달한 향기가 솜사탕의 크기만큼 부풀어 오른다. 한동안 구름을 보면, 파스텔 색감과 이 향기가 생각날 터다.

 흘러간 것에 대한 상상. 공간에 대한 기억. 작은 매개체로 퍼져나가는 추억.

 향은 그 자체가 비밀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그런 면에서 향기는 여행과 닮았다. 여행도 그렇다. 지난 여행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잠시간 현실을 벗어나게 만들어준다. 때로 남의 여행은 곧 나의 여행이 되기도 한다. 그 역시, 기억과 상상으로 이어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날 내가 고른 건 라벤더가 아닌, 달달한 우유 냄새 나는 향이었다.




On the next





포송 [유진]

Blog : http://blog.naver.com/hik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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