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사원 들여다보기. 첫번째
몇 안 되는 돌계단을 올라, 여기저기 펼쳐진 돌무더기 사이를 걸어가면 나란히 서 있는 세 개의 탑이 보인다.
프레아 코(Preah Ko) 사원이다.
사원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건 섬세하게 쌓아 올려진 탑의 상부층도, 몸체에 자리 잡은 반각의 조각상도 아니었다.
황소였다.
줄 맞추어 앉은 황소 세 마리가, 프레아 코앞에 있었다.
난디(Nandi).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소다.
이 수소, 머리가 나쁜 것인지 아니면 좋은 것인지 모를 부분이 있다.
시바신은 어느 날 난디에게 명한다. 인간 세계로 내려가 인간들에게 매일 기름 목욕을 하고, 한 달에 한번 먹으라 조언하고 오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명령을 착각한 난디는 한 달에 한 번 목욕하고, 매일 먹으라고 인간들에게 전하고 만다.
이에 시바신은 난디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네가 매일 먹으라고 했으니, 네가 인간들 농사 도와주고 와!”
난디의 착각 덕분에 인간들은 매일 먹을 수 있게 되게 된 셈이다. 얼핏 한 달에 한 번만 먹으라는 시바 신의 명령에 부당함을 느낀 난디가 일부러 명령을 잘못 전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순순히 농사일을 도와주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사원을 수놓은 수많은 조각들을 제쳐두고, 난디의 조각상이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익숙함 때문일 것이다.
농경 사회였던 한국에서도 소는 중요했다. 18세기, 최북의 기우 귀가(騎牛歸家)에는 짚신을 신은 소의 그림이 실려 있다. 그뿐인가. 평산 소 놀음 굿에서 소는 신들이 인간들에게 나누어 주는 복을 싣고 가는 상징으로 등장한다. 소가 나오는 옛날이야기, 하면 당장 떠오르는 설화도 있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 다. 이 설화에서도 소는 게으른 인간을 일깨워주는 동물로 등장한다.
나는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시골에 산 적이 없다. 그때도 시골집에서 소를 기르지는 않았다. 내가 직접 농사를 지은 적도 없다. 소를 직접 본 적이라야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데도 소, 라는 말을 들으면 친숙하다 느낀다.
어쩌면 내 몸 안 세포 어딘가에 새겨진 옛날이야기가 혈관을 타고 흘러서인지도 모르겠다.
난디를 한참 바라보다 프레아 코 사원의 계단을 올랐다.
프레에 코 사원은 인드라바르만 1세가 선조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사원이다. 앞에 세 개, 뒤에 세 개씩 총 여섯 개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가운데에 있는 탑에는 시바신이 모셔져 있는데, 왕은 제의를 통해 신과 교제한다 여겨졌다.
어째서 시바신이었는가.
건립 초기, 크메르 왕국은 안정의 신인 비슈누보다는 파괴의 신인 시바를 더 알맞은 수호신으로 여겼다. 크메르 왕국의 시조인 자야바르만 2세는 자신을 시바신으로 칭하였다. 신과 왕을 일치화 시키는 신왕 사상을 정립한 셈이다.
안드라 바르만 1세로써도 시바신은 중요했다. 당시 크메르 왕국은 적자 승계가 아니었다. 왕족 중 가장 힘이 강한 사람이 왕좌를 차지하는 구조였다. 안드라 바르만 1세가 자야바르만 2세의 외손자라던가, 혹은 양아들이라던가 하는 설들이 다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느 쪽이든, 친아들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기에 안드라 바르만 1세에게는 시바신의 강력한 힘과 위세가 필요했을 것이다. 안정의 비슈누를 수호신으로 삼기에는 아직 일렀다.
힌두교의 최고 신 중 한 명인 시바.
전쟁과 파괴의 신으로 유명한 시바는 이외로 능청스러운 신이다.
시바 신과 악마 라바나의 일화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시바를 계속 공격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악마 라바나. 약이 오른 라바나는 시바가 사는 카일라스 산을 통째로 없애 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호기롭게 카일사스 산을 들어 올리기 시작한다.
그때에 시바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부인 파르바티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라바나에게 보란 듯이 부인과 꽁냥거리며 엄지발가락으로 땅을 눌렀다. 그러자 산을 들어 올리려던 라바나는 오히려 산 아래 납작하게 눌리고 만다. 신화적인 해석을 제쳐놓고라도 그럴 만도 하다 싶어 진다. 느닷없이 다른 사람의 애정행각을 목격해야 했으니 놀라기도 놀랐으리라.
이외로 순진한 신, 라바나가 가여워지는 순간이다.
힌두교는 다양한 토착 신앙이 흡수되고, 뒤섞여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힌두교의 신들에게는 인간적인 모습이 많이 엿보인다. 한라산을 베개로 삼아 눕고, 오줌으로 섬을 멀어지게 한 설문 대할망의 능청스러움이 떠올랐다.
프레아 코 사원에 올라 탑과 탑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그곳에는 한 가문의 축복이 깃들어 있다. 탑 사이를 거닐다 어두운 탑 안, 신전이 놓인 중심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둡고 좁은 방 안의 신단은 어질러져 있었고, 곳곳의 벽돌은 무너져 내려 있었다.
그러나 탑 가장 위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은 어스름히, 탑의 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 빛이 익숙하다 느낀 것은, 난디에게 눈길이 머물렀던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신기하게도, 세상 어딘가에서든 닮아 있다.
사원의 탑을 통해 신과 닿을 수 있다는 믿음.
이야기를 통해 후손들과 닿을 수 있다는 믿음.
나 역시도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옛이야기를 듣던 작은 아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