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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Aug 27. 2024

암 환자의 하나도 안 특별한 버킷리스트

episode 13.

  



한 번 암 환자가 된다고 죽을 때까지 암 환자인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하지만 아무리 표준치료(수술-항암-방사선)를 잘 마치고 몸에 암세포가 보이지 않는 깨끗한 상태가 된다고 해서 완치가 된 것도 아니다.


암 환자라는 완장에는 5년이라는 기한이 존재한다. 암에 걸린 이후 5년 동안은 추적관찰을 하면서 나름의 지켜야 할 의무와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예를 들어 암환자는 3-6개월마다 추적관찰을 위한 여러 검사들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대신, 그 모든 치료와 검진에 대해서는 보험을 적용한 비용만을 부담하면 되는 권리도 있는 것.

보험 적용이 너무나 감사한 일이긴 하지만 그 보험 적용 안 받아도 되니 추적관찰도 안 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긴 하다. 왜냐면 추적관찰은 하면 할수록 두렵고 전혀 익숙해지지 않으며 정확히는 매번 단두대에 오르는 심정이기 때문이다. 단두대에 일 년에 서너 번 오르다 보면 그나마 아끼고 아껴 쓰고 있는 수명까지 줄어드는 기분이 든다.      




이번 주엔 열 번째 CT 촬영을 앞두고 있다.

늘 검사를 앞두고는 괜히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오감이 예민해진다. 원래 쓰던 ‘자궁’에 관한 글이 있었는데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아 내 기분 전환을 위한 글을 쓰기로 한다. 아주 개인적인 바람에 관한 글이라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미리 감사드린다.      




버킷리스트 정하기.

Bucket list 버킷리스트란 죽기 전에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것들을 정리한 목록을 의미한다.

사실 버킷리스트 같은 건 사치일 뿐, 나에겐 그저 목표만이 있었다. 하지만 암 환자가 되고 나서부터 내 목표는 오로지 ‘무사히 마흔 살 되기’가 되었고 마흔 살이 지나면 ‘무사히 할머니가 되기’로 바뀔 예정이기 때문에 다른 목표는 없다. 목표가 너무 명확해 다른 목표는 세울 엄두가 나지 않는 삶을 살다 보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버킷리스트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더구나 ‘죽기 전에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것’이라니. 죽음이라는 단어가 인생 어느 때보다 명료하고 선명했던 시기를 지나왔기에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대뜸 갑자기 정해 본 열 가지의 버킷리스트.




1. 수영 배우기

우리 집 가족 세 명 중 유일하게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개헤엄은 칠 줄 알지만 제대로 수영을 배워본 적이 없기에 멋있는 이름을 가진 수영들은 못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해보고 싶은 건 잠영이다. 고요한 물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 인어공주처럼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내 평생의 워너비. 하지만 물이 무서워 잠수에 겁을 먹는 내가 잠영이라니..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버킷리스트’로 이 정도면 꽤 양호하다고 여겨진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배울 수 있는 것이고 배우다 보면 언젠가는 잠영을 시도해 볼 날이 올 테니까. (물론 해보다가 너무 힘들면 자유형으로 바뀔 수도 있다.)



2. 합창단원 되기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은근히 음악 안에 있던 때가 많다. 특히 중학교 때 엄마가 억지로 시켰던 관현악단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었는데, 클라리넷 연주하는 게 재미있었던 적은 거의 없지만 악단에 일원으로 속해 있는 느낌은 좋아했다. 그러니까 다양한 악기 소리에 파묻혀 있을 수 있다는 그 느낌. 무대 위는 그 어떤 VIP 관객석보다 악기들의 소리가 가깝고 크게 들리는 곳이라 비단 소리뿐만 아니라 몸을 둥둥 울리는 전율까지도 느껴지곤 했었다. 특히 클라리넷이라는 악기는 멜로디를 이끌어 나가는 현악기가 아니라서 악보 상에 연주하는 부분도 있지만 쉬는 부분들도 있다. 연주하지 않을 때는 선율에 몸을 맡기고 감상하다가 내 순서에 맞추어 클라리넷을 힘껏 불면 내가 낸 소리가 그 음악 속에 물들듯이 스민다. 마치 음악과 내가 하나 되는 듯한 그 순간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을 느꼈었다.

이와 비슷한 경험으로 학교에서 열렸던 합창대회가 있다. 다 함께 목소리를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화음을 쌓으면서 내 목소리가 하나의 재료가 되어 아름다운 노래를 완성한다는 희열 같은 것들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그러니까 악기연주든 노래든 함께 음악을 지어내고, 그 음악 안에서 음악을 느끼는, 이미 알고 있는 기쁨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 그런데 굳이 관현악단이 아니라 합창단을 선택한 것은, 무엇이든 단원이 되려면 당연히 많은 연습이 필요한데 악기 연주보다는 노래 연습 쪽이 훨씬 즐거울 것 같기 때문이다. 둘 다 영 소질은 없지만 고르자면 노래다.      



3. 윤하 콘서트 가기

버킷리스트를 쓰다 보니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을 새삼 인정하게 됐다. 대중가요도 무척 좋아하다 보니 좋아하는 가수들도 많은데 그중에서도 윤하를 가장 좋아한다. 원래부터도 인기 많은 가수였지만 사건의 지평선으로 역주행 신화를 일으키며 콘서트 가기가 더 어려워져서 나같이 느린 사람은 슬플 따름. 요즘엔 9월 1일 7집 정규앨범 릴리즈 되는 것만 기다리고 있다. 사랑해요 반려가수 고윤하!      



4. 모임 만들기

고백하자면 나는 내향형 인간임에도 대학교 때까지는 무척 친구도 많고 모임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결혼-임신-출산-육아를 거치면서 모임이란 모임은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이제 주변에는 손에 꼽을 만한 절친한 친구들과 가족들뿐이다. 그 단순한 인간관계가 너무 가뿐하고 마음에 들지만 가끔은 왁자지껄한 모임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게 바로 언제냐면.. 바로 마피아 게임이 하고 싶을 때다. 내가 술자리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던 게임이 마피아 게임이었다. 그때는 언제든 원하면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몰랐지만 할 수 없게 되자 얼마나 그 게임을 좋아했는지 알게 된 케이스. 마피아 게임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재미있는데 나는 거의 1:1의 인간관계를 맺고 있고 가족 중엔 마피아 게임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마피아 게임 못 한 지가 10년은 넘은 것 같다.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깔깔대며 마피아 게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짝짜꿍이 잘 맞는 모임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       



5. 어디서든 일 년 살아보기

해외도 좋고 국내도 좋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살아야 할 필요도 없는 곳에서 일 년 정도 살아보고 싶다. 결혼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사를 많이 다니면서 낯선 곳에 정착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말았다. 지금 사는 곳에서 3년 넘게 살고 있는데 이게 결혼생활 10년 동안 가장 오래 산 집일 정도. 이제는 슬슬 떠나고 싶어진다. 사주에 역마살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특별히 동경하는 나라나 지역은 없지만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면 좋겠고(요즘 같은 기후 위기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지만.) 맨날 혼자 있고 싶다고 난리 치지만 혼자 살기보단 가족과 함께라면 더더욱 좋겠고.



6. 농사짓기

시골에서 나고 자랐고 농부의 유전자가 흐르기 때문에 아마도 텃밭 농사를 지으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아마도 착각일 것이다. 농사가 얼마나 희생적이고 숭고하고 힘든 작업인지 잘 알기 때문에 감히 주말농장조차도 시도를 못 했었으니까. 하지만 꼭 한 번 텃밭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 열심히 농사지어 내가 기른 식재료를 수확해서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든다면 그 자체로 충만한 기분이 들 것 같다.       



7. 파스타 완벽 정복

내가 텃밭에서 수확한 작물들로 가장 하고 싶은 요리는 역시나 파스타다. 나는 파스타를 좋아한다. 지독한 한식 파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파스타다. 피자는 싫어한다. 오로지 파스타. 파스타의 매력은 만들기가 비교적 간단하면서 다양한 재료를 이용할 수 있어 영양소를 챙기기에도 취향을 챙기기에도 좋은 음식이라는 것. 그리고 한 접시 요리일 뿐이지만 무언가 나에게 근사한 한 끼를 대접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딸아이가 좋아하는 파스타를 만들어 주는 정도의 실력이지만 열심히 갈고닦아 진짜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 줄 알게 된다면, 새로 만든 모임에서(버킷리스트 4 참조) 실력 발휘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8. 단둘이 여행

‘단둘이 여행’이라는 건 그 누구든지 둘이서만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딸이랑 둘이 여행, 남편이랑 둘이 여행, 아빠랑 둘이 여행, 동생이랑 둘이 여행, 친구랑 둘이 여행 이렇게. 가족끼리 다 같이 떠나는 여행도 재미있지만 단둘이서 하는 여행은 좀 더 가볍기도 좀 더 깊기도 좀 더 은밀하기도 한 묘미가 있다. 물론 가장 하고 싶은 건 엄마와 단둘이 여행이지만, 그건 나중나중에 내가 하늘나라에 가서 할 일이라 이생에서의 버킷리스트에서는 제외.      



9. 한도 없는 카드로 쇼핑

음. 이건 유일하게 암 환자가 되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동일하게 바라는 유일한 카테고리랄까.. 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바라는 바 아닐까? 아니시라면 존경합니다 진심.      



10. 딸아이의 자립 생활 지켜보기  

대망의 마지막 버킷리스트는 가장 원하는 버킷리스트이기도. 지난 글에서 설명했던 암환자의 십계명 중의 하나가 ‘살아야 할 강력한 이유 찾기’였다. 나에겐 딸아이의 자립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내가 살아야 할 강력한 이유다. 이유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이유. 스스로를 거뜬히 지킬 수 있는 어른이 된 우주가 부모의 품을 떠나 자립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떠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정말 그 외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 그러니까 여태껏 열심히 써놓은 앞에 아홉 가지 버킷리스트는 이 10번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자립 생활 지켜보기까지 시간이 남을 테니 틈틈이 아홉 가지의 버킷리스트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암 환자가 되기 이전에 나의 바람들을 떠올리면 경제적인 능력, 사회적인 능력, 외적인 능력 아무튼 모든 능력을 갖추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암 환자가 되고 나서 끄적여 본 나의 버킷리스트는 그야말로 일상적이다. 누군가에겐 너무 평범해서 ‘에게게 겨우 이게 버킷리스트?’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의 버킷리스트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냥 ‘일상’ 그 자체다. 그러니까 일상을 살 수 있는 것.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를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나의 책임이 모두 다 했을 때 조용히 저무는 것.



하나도 안 특별한 이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씩 이뤄가며 살다가, 결국에는 ’할머니’라는 엄청난 황금 타이틀도 달며 또 살다가,

어느 화창한 날에 조용히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정말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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