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2.
“88년생 강윤이 님!”
간호사 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폐경기 클리닉 복도에 울려 퍼졌다.
“네..!”
어쩐지 움츠러드는 목소리를 간신히 끌어올리며 작지도 크지도 않게 볼륨을 조절해 대답한다.
혹시라도 간호사 선생님이 못 들으셔서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부르는 불상사가 없도록 손을 최대한 길쭉하게 펼쳐 들며. 하지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폐경기 클리닉 대기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날아와 꽂힌다.
하긴, 이상할 일도 아니다.
이0자, 박0순, 김0옥 비슷비슷한 이름 사이에 ‘강0이’라는 내 이름이 혼자서 동동 튀는 것처럼 그 공간에서 내 모습도 그랬으니까.
자궁과 이별한 지도 벌써 2년. 수술 이후 방사선 치료를 진행하면서 난소 또한 제 기능을 잃었고 완전한 폐경기에 접어들었다. 서른일곱 나이에 갱년기를 겪느라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고 수시로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요즘 같은 열대야엔 에어컨에 선풍기에 부채질을 하고 있어도 덥다. 굳이 로맨스를 챙겨보지 않아도 심장이 대뜸 두근거리고 삭신이 쑤신다는 말이 몸소 이해되어 헛웃음이 날 때도 있다. 맨날 쓰던 단어도 생각이 안 나서 ‘그거 있잖아, 그거! 저기 있잖아, 저기!’하면서 모든 말을 지시대명사로 이어가는가 하면 가스 불 올려놓고 깜박하기도 일쑤. 가끔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처럼 영문도 모른 채 마녀의 저주로 인해 할머니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얼마 전, 안경을 맞추러 가서 시력검사를 하다가 또래보다 노안이 더 빨리 올 수도 있겠다는 안경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빠르게 노화하고 있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래, 이건 꿈도 저주도 아닌, 그저 조기 갱년기로구나!
엄마가 조기 갱년기를 겪어서일까. 열 살인 우리 딸도 조기 사춘기가 오려고 하고 있다.
아직은 초등학교 3학년 꼬꼬마라고 생각했는데 얼굴에 뾰루지가 한두 개씩 간혹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좋아하는 남자친구도 생기고 옷 쇼핑에 취미를 붙이질 않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매일매일 바꾸고 꾸미기 바쁘다.
엄마는 내 마음도 잘 모른다면서 대뜸 울기도 하고 간섭하지 말라면서 바락바락 대들고 숙제가 많은 날에는 얼마나 짜증을 내는지 쟤가 내가 알던 애가 맞나 싶기도 하다.
만일 내가 오십 즈음 자연스럽게 폐경을 했다면 사춘기 vs갱년기의 전쟁이 벌어져 폭발했을 수도 있겠지만 암을 겪으며 강제 폐경기를 맞이해서일까. 우리 딸이 이만큼 커서 심통 부리는 거 보는 것도 감사하다 싶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이렇게 단점만 수두룩 빽빽할 것 같은 조기 갱년기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은근히 장점도 많다.
지긋지긋하게 번거롭고 아프고 힘들었던 생리를 하지 않으니 생리전증후군도 생리통도 없고, 생리대 살 필요도 없으니 그 돈으로 여성청소년을 위한 생리대 기부도 할 수 있다. 또래에 비해 빨리 노화하고 있지만 다르게 말하면 보다 성숙해져 가는 것이라 물리적으로 몸이 힘든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마음만큼은 오히려 편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으니 쓸데없는 감정 소모에는 신경을 끄게 되고 건강을 과신하지 않고 내 몸과 마음을 잘 돌보게 된 점도 큰 수확이다.
말하다 보니 어쩐지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공신력을 더하기 위해 리어 해저드가 쓴 <자궁 이야기>의 ‘폐경-끝이자 시작’ 챕터를 펼쳐 요약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BBC 시리즈 <플리백>의 주인공 서른두 살의 여성 ‘플리백’이 여성 사업가들을 위한 시상식에 다녀온 후 칵테일을 마시며 우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쉰여덟 살의 벨린다는 플리백에게 폐경기 여성의 지혜가 담긴 한마디를 건넨다.
“여자들은 오랫동안 생리로 고통을 겪어. 우리는 그 고통을 가지고 태어나지.”
반면 폐경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것”일 것이라고 벨린다는 약속한다.
“넌 자유야. 더 이상 노예가 아니고, 더 이상 부품들로 이루어진 기계가 아니지. 넌 그냥 사람이야.”
그러니까 벨린다의 말은 자궁의 은퇴는 수많은 자궁질환이 주는 신체적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선사할 뿐만 아니라 섹스와 출산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사회에서 여성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스러운 짐에서도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 더 이상 호르몬의 노예도, 잠재적 생식 파트너도, 생명을 잉태하는 그릇도 아닌, 마침내 자신의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는 ‘그냥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폐경기에 잠재력에 대해 쓴 많은 글이 있다.
조 호드슨은 “만일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여성이 훌륭하고 유능하고 멋진 존재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폐경기가 좀 더 수월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시기를 여성이 자신을 탈바꿈시키는 역동적인 잠재력의 시기, 즉 육아나 경력 쌓기 같은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탐색하고 즐기는 시기로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다.
폐경기는 여성이 가장 자기답고 진실한 자신을 탄생시켜야 하는 시공간이며, 젊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성적, 생식적 역할과 죽음이라는 생애 마지막 전환기 사이에 주어지는 자아실현의 황금시간이라는 것이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호평받는 과학소설 작가인 어슐러 르 귄은 에세이 <쭈그렁 할멈>에서 폐경기 여성을, 자신을 잉태한 마법적인 경계에 있는 존재로 상상한다. 르 귄은 생식력이 꺾인 후에도 여전히 충만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싶은 여성은 “자기 자신을 잉태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 부분을 읽고 가슴이 미칠 듯이 두근두근 뛰었는데 이건 폐경기 증상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으로 인한 기쁨, 미래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들로 꽉꽉 들어차 날뛰는 두근거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나는 나이로는 젊은 여성이기에 여전히 요구되는 역할들이 많다. 육아도 해야 하고 경력 쌓기와 같은 책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폐경기라는 시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단순하지만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 이상, 부지런히 나의 욕망을 탐색하고 즐기면서 진실된 나 자신을 탄생시키는 시공간을 맞이하고 싶어졌다. 나 자신을 잉태하고 싶어졌다. 자아실현의 황금기를 누리고 싶어졌다.
어쩌다 보니 남들보다 조금 빨리 '그냥 사람'이 되었으니까! 완전 럭키비키!
열 살짜리 딸이 읽던 책 <사춘기 대 갱년기>라는 아동문학 도서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춘기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시기. 갱년기는 자기 자신에게 엄마 노릇을 시작하는 시기래.”
그렇다. <쭈그렁 할멈>에서 폐경기 여성을 자신을 잉태한 마법적인 경계에 있는 존재로 상상한 것처럼,
폐경기 여성은 자신 자신을 잉태하고 출산해야 하고 그에 그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자신에게 엄마 노릇을 해야 한다. 내가 나의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를 일찍 잃고 폐경기까지 일찍 맞이한 나에게는 무척 든든하고 더욱 힘이 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을 잉태한 쭈그렁 할멈은 마침내 여성 경험의 빛과 그림자를 구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폐경기 여성의 탄생도 아기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추하면서도 아름답고, 위험하면서도 기적적이며, 한 세계에서 다음 세계로 가는 육체적, 정신적 전환이다.
추하면서도 아름답고, 위험하면서도 기적적이며, 한 세계에서 다음 세계로 가는 육체적, 정신적 전환을 겪고 있는 서른일곱의 나. 다시금 바라보니 새삼 그 어느 때보다 유난히 반짝반짝 빛이 난다.
“88년생 강윤이 님!”
다음 폐경기 클리닉 진료일에도 어김없이 간호사 선생님은 우렁찬 목소리로 나를 부르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자유롭고 충만하게, 역동적이고 씩씩하게,
반짝반짝 빛을 내며.
“네! 저 여기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