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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Aug 20. 2024

옥시토신을 찾아 떠나는 암환자를 위한 안내서

episode 11.

      


암 수술을 마치고 내가 가장 먼저 읽었던 책은 샨티 출판사에서 나온 <암, 그들은 이렇게 치유되었다>였다. 450쪽이 넘는 꽤 두툼한 책이라서 내용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암을 이겨낸 사람들의 10가지 공통된 치유 요소는 각인처럼 남아 여전히 꽤 정확히 기억한다.          



1. 운동

2. 영적 연결을 강화하기

3. 자신의 건강을 주도적으로 다스리기

4. 긍정적 감정 키우기

5. 자신의 직관을 따르기

6. 억눌린 감정 풀어주기

7. 식단의 근본적인 변화

8. 허브와 보조제 사용

9. 살아야 할 강력한 이유 찾기

10. 사회적 지지를 받아들이기          



그 당시의 나는 반드시 이 열 가지의 치유 요소 모두를 내 삶에 잘 적용해서 꼭 암을 이겨내겠노라는 열의에 불타있었다. 물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선 활활 타오르던 열정은 한풀 꺾였고, 현실과의 적당한 타협을 해가며 지낸지도 벌써 2년이 지났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인생의 십계명처럼 삼고 살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심혈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4. 긍정적 감정 키우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는 예민한 기질을 타고 난데다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 어릴 때부터 늘 불안과 걱정을 안고 살았다. 아무도 뭐라고 안 했는데 스스로를 볶아치기 바빴고 그야말로 긍정의 정반대에 서 있는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암 환자가 되어있었고, 이제는 오직 살기 위해서 부정에서 벗어나 긍정으로 부지런히 달려가야만 했다.

그런데 어떻게 가야 하지? 지도를 찾아야 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옥시토신’이다.      



옥시토신은 긍정적인 느낌이 들 때마다 즉각적으로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우리로 하여금 더 사교적이고 사람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두려움과 불안,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더구나 최신 연구들을 검토한 결과 옥시토신이 유방암과 난소암의 성장과 전이를 늦춘다는 사실도 발견하였다니.

세상에, 이건 마치 나를 위한 호르몬이 아닐까?


책에서는 이런 옥시토신을 증가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웃음’이라고 했다. 웃음에 관한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환자가 한 시간짜리 코미디 비디오를 봤을 때 코티솔 수치가 감소하고 통증에 대한 내성이 증가하며, 불안과 스트레스 수준이 감소하고, 혈압이 개선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고. 사실 새로울 것도 아닌 것이 많은 암 환자들이 치료를 받으며 힘들 때 좋아하는 예능을 보면서 힘을 냈다는 이야기를 왕왕 듣기도 했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옥시토신을 팡팡 분비시켜 줄 ‘재미’를 찾자!

고 했지만 도저히 재미있는 게 없었다. 예능도 코미디도 드라마도 딱히 안 좋아하는 재미없는 인간이었으니까. 내가 재미있어하는 게 뭐였지? 그때 불쑥 연애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연애를 주제로 한 리얼리티 예능. 나는 ‘남이 연애하는 걸 쓸데없이 뭣하러 보고 앉았냐?’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연애프로그램 좋아했었다. 산장미팅 장미의 전쟁을 보면서 연애를 배우고, 우리 결혼했어요를 보면서 결혼을 꿈꾸고 하트시그널을 보면서 지난 연애의 추억을 되새김질해 왔던 것이다.


요양병원에 누워 볼 만한 연애 프로그램을 서둘러 검색하다가 마침 환승연애2가 방영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것은 운명이다!     

나는 환승연애1도 당연히 애청했었는데 환승연애2는 내가 암 진단을 받고 수술하는 시기에 시작했던 터라 공개됐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로지 옥시토신을 위해 환승연애2를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환승연애는 다양한 이유로 이별한 커플들이 한 집에 모여 지나간 연애를 되짚고 새로운 인연을 마주하며 자신만의 사랑을 찾아가는, 다소 당혹스러운 컨셉의 연프다. 전체적인 틀은 타 연프와 다를 바 없이 한 집에서 합숙을 하고 호감도를 문자로 표현하고 랜덤 데이트를 하고 선택도 하는 시스템이지만 그 안에서 가장 다른 지점이라면 그 안에 ‘X’와 함께한다는 점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앞에서 사랑을 찾아야 한다는 점은 환승연애의 키포인트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매력을 품고 있는데 이 매력이 폭발할 때는 무엇보다 솔직할 때이니까. 그리고 솔직함이란 절대 억지로 만들 수 없고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극대화되는 감정이니까. 출연자끼리의 관계 자체가 그의 캐릭터를 더욱더 입체적이고 매력적이게 만드는 연출인 것이다. 나는 마치 연프 평론가처럼 새로운 화가 공개되는 금요일 오후만 손꼽아 기다리며 환승연애2를 열심히 시청했다.

옥시토신아 솟아나라!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주변에 환승연애2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희한하게 언니도 동생도 친구들도 아무도 환승연애2를 안 봤다. 같이 앉아 보지는 못하더라도 끝나고 나서 ‘야 너 그거 봤어?’ 하면서 시시콜콜 분석하는 재미가 쏠쏠한데 말이다. 어쩐지 외롭고 헛헛한 마음이 몰려왔다.

아 안돼 나의 옥시토신을 지켜야 해!

누구라도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달래고자 유튜브에 ‘환승연애2’를 검색했다. 그때 내 눈에 ‘찰스엔터’가 들어왔다.      




찰스엔터는 개인 유튜버가 운영하는 채널이었고 주로 연애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리액션 콘텐츠가 많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리액션 영상이 뭔지도 모르는 바보였지만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찰스엔터의 환승연애2 리액션 영상을 클릭하게 되었고.. 그 이후 찰스엔터는 나의 유일무이 유튜버가 되고 말았다.



찰스의 리액션은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솔직해서 속이 다 시원했고 표정이나 행동이 너무 귀엽고 웃겨서 나도 모르게 깔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 환승연애2보다 찰스엔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는 인생 처음으로 구독, 좋아요, 알림 설정을 누르게 된다.      


그 후 나는 찰스의 지난 리액션 영상과 브이로그는 물론 심지어 라이브도 챙겨보고 ‘연습생’이라는 구독자 애칭도 함께 만들고 스스로를 연습생이라 명명하기 시작하며 찰스엔터의 찐 팬이 되고야 말았다. 찰스의 영상을 보고 있으면 내 몸에서 옥시토신이 팡팡 터지며 축제를 여는 것이 느껴졌다. 웃음 장벽이 높고 웃는 것에 인색한 내가 낄낄낄 혼자 웃고 있는 걸 자각할 때면 왜 이러지? 싶을 정도였다. 그게 내가 인생에서 가장 아프고 어두운 터널을 건널 때라 그랬던 건지 아니면 찰스가 진짜 그만큼 웃겼던 건지 둘 다 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나는 찰스가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생과 사의 길 위에서 때때로 불안하고 무서운 순간이 나를 덮칠 때마다 아무 생각 없이 웃게 해주는 랜선 친구가 있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래서 옥시토신의 힘을 빌어 인생 최초로 모르는 사람에게 대뜸 디엠을 보냈다.

(디엠 내용을 포함해 찰스엔터에 대한 애정을 담은 글을 이미 쓴 게 있으니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D)




디엠을 보낸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까지 받았고, 나는 그걸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어 블로그에도 올리고 브런치에도 글을 써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브런치에서 누가 나를 응원했다는 알림이 왔다. 그때는 응원하기 기능이 뭔지도 모를 때였다. 내가 쓴 <나의 1호 유튜버, 찰스엔터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에 찰스가 등판하여 내 글을 응원하고 댓글을 달고 그것도 모자라 인스타 스토리로 올려둔 것이 아닌가.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을 응원한 1번째 독자가 되었다!”하고.           



“친구가 링크 보내줘서 읽게 되었어요.. 너무 감동이고 울컥했어요. 사실 전에 블로그 글도 봤었는데 벅차오르는 감정을 글로 차마 표현할 수가 없어서 따로 댓글 남기지 않았었거든요. (그때는 읽고 정말로 울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항상 ‘나대는 애’였어서 관심을 많이 받는 편이었던 것 같아요. 유튜브를 하면서도 감사하게도 관심을 많이 받았는데, 이렇게 사랑받는 느낌은 정말 또 다르게 다가와요. 그만큼 그냥 지나치는 관심과 머물러 주는 사랑은 참 다른 것 같아요.

작가님은 머글이어서 덕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셨는데 저는 덕후여서 누군가 저를 팬심으로 좋아하는 게 이해가 안 갔던 것 같아요. 지금도 이렇게 저를 좋아해 주시는 게 이해는 잘 안 가지만 믿어요. 이 글을 읽으니 진심이구나 너무 믿어져요. 누군가가 저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면 이유가 뭘까? 내가 잘난 것도 없는데 왜?라고 생각했는데 <좋아해, 이유는 없어.> 이게 그 답이 되어줬네요.

정말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웃을 일이 많으셨으면 좋겠고, 앞으로도 그 웃을 일에 제가 이유가 되길 조심스레 바라요..

응원하고, 사랑합니다❤ -찰스 올림“




예상치 못했던 찰스의 응원을 담뿍 받은 그날 나는 옥시토신 과다분비로 눈물이 철철 났다.

아주 오랜만에 흘린 기쁨의 눈물이었다.

울면서 <암, 그들은 이렇게 치유되었다> 그 책을 떠올렸다. 나에게 옥시토신을 찾아 떠나라고 말한, 그래서 찰스를 만나게 해 준, 그 두껍고 친절한 안내서 말이다.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때로는 스스로 웃거나 기쁨을 느끼기가 어려울 수도 있으므로 자신만의 ‘조이 스쿼드’를 구축하는 것을 고려해 본다. 간병인, 가족, 친구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치유를 어떻게 도울지 잘 알지 못해서 종종 무력감을 느낀다. 이때 그들에게 당신이 더 행복하고 기분도 더 밝아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면 이는 모두를 위한 윈윈 전략이 된다. 당신과 상대방은 즐거운 웃음과 행복한 경험의 긍정적인 엔돌핀을 공유하고, 상대방은 자신이 당신의 치유에 기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친구와 가족에게 매일 밈, 사진, 비디오 또는 유머를 보내 당신을 웃거나 미소 짓게 해달라고 요청해 보라. 당신 인생에서 만난 유머가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 일주일에 한 번 전화를 걸어 기분을 가볍게 해달라거나 조이 스쿼드 팀 구성원에게 한 달에 한 번 당신을 행복하게 할 깜짝 이벤트를 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나도 미처 몰랐고 찰스도 당연히 몰랐겠지만, 찰스는 나의 조이 스쿼드 팀 주장이었던 것이다. 요즘도 가끔 마음의 먹구름이 몰려오는 날이면 찰스의 영상을 틀어놓고 마음껏 하하호호 낄낄대며 옥시토신을 맞이한다.

재미는 암을 뿌신다! 주문을 외우면서.


암 진단을 받았거나 암 치료 중이거나 암 경험자로 살고 계신 많은 분들에게 당신만의 조이 스쿼드 팀원을 어서 모집하라고 말해주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이제 구독자가 거의 30만 명을 향해가는 어엿한 중견기업이 된 찰스엔터의 대표 찰스는 얼마 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유튜버로 전향을 선포했다.

올레!

나의 조이 스쿼드 팀 주장이 앞으로 나에게 안겨줄 즐거움이, 나의 옥시토신이 내 몸 안에서 황홀한 축제를 열며 펑펑 터트릴 불꽃놀이가, 부지런히 부정을 떠나 기어코 긍정의 정상에 도착할 내 자신이,

너무나 기대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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