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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Sep 03. 2024

엄마라는 조약돌

episode 14.



    

오늘은 엄마가 하늘나라로 여행 간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다.      



“3년 정도 지나면 그래도 숨이 좀 쉬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예전 우리 조상들이 삼년상을 치른 걸까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언젠가 누군가의 댓글을 보고 매우 인상 깊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엄마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라 그 댓글을 보면서 정말 3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걸까? 이 상실의 비통함과 아픔과 슬픔이 정말 3년이 지나면 좀 옅어지는 걸까? 궁금했었다.      


그렇게 시간은 정직하게 흘렀고 어느새 3년이 지나 오늘이 됐다.      


지금 돌이켜서 저 댓글을 바라보니 ‘저분은 참 열심히 애도를 했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추측건대 아마도 저분은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탈상을 할 때까지 생활했다던 옛 유교 풍습처럼 3년 동안 열심히 부모에 대한 못다 한 보은을 다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했던 게 아닐까.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첫 일 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울기만 했고 엄마의 1주기 즈음 암 진단을 받아 수술과 치료를 이어가면서 내 몸 하나 신경 쓰느라 또 정신이 없었다. 애도의 마음 같은 건 애써 모른 척 미뤄둔 채 꾸역꾸역 살다 보니 벌써 3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여전히 처음처럼 많이 힘들고 아프고 슬프다.


그래서 엄마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노트북 앞에 앉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구나 싶다는 생각에. 그냥 짧게 하소연이나 해야 할까 싶다.       




얼마 전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강한 스콜성 소나기가 쏟아진 날이 있었다. 우산도 없이 등교한 딸이 학원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 됐는데도 감감무소식 연락이 없었다. 나는 걱정이 되어 우산을 챙겨 들고 학원 앞으로 갔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질 않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옆에 지나가던 딸과 동학년의 아이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우주 찾으세요? 우주 아까 전에 친구랑 같이 편의점 쪽으로 갔어요.’

‘어머 그래? 알려줘서 고마워.’하고 급히 돌아섰다.     



아니, 이렇게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이 어딜 간 걸까. 빗속을 뚫고 편의점 쪽을 향해 달려가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받아보니 아이 목소리.



‘엄마, 폰이 꺼져서 연락 못 했어. 이거는 친구 폰이야. 지금 편의점에 있으니까 나 여기로 데리러 와줘’          



아이의 목소리를 듣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우. 숨을 몰아 뱉자 머릿속에 안개가 거치며 갑자기 아까 나에게 우주의 행방을 알려줬던 그 친구가 생각이 났다. 그 친구에게 우산이 있었나? 없었던 것 같았다. 딸 걱정을 하느라고 그 친구가 우산이 없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난감해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챈 들 내 딸을 찾는 게 우선이라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갑자기 죄책감과 함께 영문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다. 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이상하게 슬펐다. 엄마 없는 설움이라는 게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 친구가 잠깐이라도 그런 걸 느꼈을까 봐 미안했던 것이다.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당장 그 순간에는 엄마가 없었으니까.           


엄마가 없다는 건 그런 거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엄마 또래의 중년 여성들이 열무와 오이를 카트에 잔뜩 담으며 수다를 떤다.

“우리 딸이 오이소박이랑 열무김치에 환장을 하잖아. 오늘 열무도 오이도 실하니까 잔뜩 해서 또 가져다줘야지”

장보다 엿들은 별것 아닌 말에도 마음이 짜르르 아파 오는 것. 옆에 멀뚱하게 서 있다 먹고 싶지도 않은 열무와 오이를 따라 사는 것. 괜히 심통이 나 그냥 냉장고에 박아두는 것. 썩기 직전 간신히 요리해 놓고 맛이 없어서 버리는 것. 버리면서 괜히 우는 것.           


엄마가 없다는 건 그런 거다.           



세상에는 엄마가 없어야만 알 수 있는 설움이 있다. 그건 엄마가 있는 사람은 절대 모른다.

그 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가 바로 정채봉 시인 아닐까. 서러운 마음이 들 때마다 속으로 되뇌어 이제는 잠꼬대로도 읊을 수 있을 것 같은 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하늘나라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 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엄마 품에 안겨 억울했던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는 마음이, 엄마를 잃은 자식의 마음 그 자체라 눈물이 막 나다가 어떤 때는 웃기기도 하다. 엄마의 휴가가 단 5분뿐인데, 엄마한테 미안했던 일 고마웠던 일 미주알고주알 엮어 건네고 마지막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마무리해도 부족한 그 시간에 숨겨둔 세상사 중에 가장 억울했던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니. 정말 너무 자식 같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 시가 좋다.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는 설정도, 휴가 나온 엄마에게 효도할 생각은커녕 응석 부리고만 싶은 마음도, 엄마 없는 사람의 설움을 완벽하게 이해한 무드도 모두 좋다.

그저 슬프게만 만들지 않고 중심을 따뜻하게 데워줘 쓸데없는 설움은 녹이고 그리움만 남긴다.                  



우리 엄마도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휴가를 나올 날이 있을까. 이게 혹시 엄마의 휴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내 꿈에 자주 등장한다.   

얼마 전에는 엄마가 꿈에서 나와서 나에게 돈을 한 보따리 쥐어 주면서 말했다.



“강윤아, 너 친구 혜미 있잖아. 걔는 테니스도 배운다더라. 너도 이 돈으로 테니스 좀 배워봐”     



이건 엄마 생전에 나에게 자주 하는 패턴의 이야기자 내가 엄마에게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비교는 지긋지긋하다고 엄마에게 소리친 적 있을 정도로 싫어하는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꿈속에서 저 이야기를 듣는 순간 드는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구나. 하늘에서도 내 걱정만 하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 만질 수 없어도 늘 내 옆에 있었구나. 내 마음속에 살아있었구나. 나에게도 엄마가 있구나.           



엄마는 나에게 조약돌이다.

처음에는 바위처럼 무거웠다가 점점 작아져서 돌이 되고, 결국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조약돌처럼 작아진다. 그래서 때로는 잊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문득 생각 나 손을 넣어보면 만져지는 것. 그래,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것. 영화 래빗홀에 나오는 대사.


오늘도 나는 주머니 속의 엄마라는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한다. 오늘 밤 꿈에 엄마가 와준다면, 엄마에게 사실은 혜미보다 내가 테니스를 훨씬 잘 친다고 말해줘야겠다고.

테니스뿐만이게? 내가 혜미보다 달리기도 잘하고 혜미보다 노래도 잘 부르고 혜미보다 글도 잘 쓴다고 말해줘야지. 그 소릴 들은 우리 엄마가 얼마나 좋아할지 그 생각을 하면 막 웃다가도 또 눈물이 난다.           



“그래, 우리 딸내미가 최고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엄마의 목소리가 맨들맨들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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