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5.
올 초 웨이브에서 공개했던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라는 예능프로그램을 우리 가족 모두 팬을 자처하며 열심히 시청했었다. 정치, 젠더, 계급, 사회윤리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12인의 젊은 남녀가 9일 동안 합숙하며 리더를 선발하고 상금을 분배하는 정치 서바이벌 사회시험.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나눠본 적 없을, 어쩌면 괜히 나누었다 불편해지기만 할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 예능이라니 안 볼 이유가 없었다. 기대만큼이나 재미있게 봤는데 보면서 한 가지 놀라운 점이 있었다.
그들은 공동의 자산으로 식사 메뉴를 결정해 함께 나눠 먹는다. 식재료를 주문해서 요리해 먹을 수도 있고 완제품을 주문할 수도 있는데, 열심히 외부 활동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온 날엔 치킨과 삼겹살을 주문해 먹곤 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이 장면에서 나는 꽤 깊은 불편함을 느꼈는데, 그 불편함 자체가 나에겐 놀라운 경험이었다.
‘저 중엔 비건이 한 명도 없는 걸까? 만약에 저기에 비건이 있었다면 추가로 공금을 지불해서 다른 메뉴를 주문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던 것이다.
7화에서는 유일하게 다른 인종의 이주자가 등장한다. 이란에서 온 바누. 갑자기 나타난 바누를 커뮤니티 안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에 대해서 격렬하게 토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이주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공금으로 그녀에게 이주 자금을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누는 명백한 소수자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바누의 입장에 서 있어 본 적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역시 저 커뮤니티 안에선 다수가 베푸는 다소 시혜적인 배려에 기대어야 하는 소수자였다. 왜냐면 나는 모두가 선택한 메뉴가 아닌 추가 메뉴를 공금으로 주문해야 하는 비건이니까. 그렇게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내가 ‘소수자’ 중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소수자’가 될 가능성을 늘 갖고 산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과연, 그동안 살면서 한 번도 소수자였던 적이 없을까?
지방 소도시의 평범한 가정 안에서 부모님 사랑 듬뿍 받으며 성장했고, 학창 시절도 비교적 원만하게 보냈고 스무 살에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서 대학 생활도 적극적으로 했다. 휴학 없이 바로 졸업하자마자 취업했고 취업하고 3년쯤 지났을 때 나처럼 평범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 이듬해 예쁜 딸아이를 출산했고 그 이후 워킹맘으로 혹은 가정주부로 지내며 세 가족 알콩달콩 잘 살아왔다. 그야말로 전통적이고 구습적인 삶 그 자체랄까. 써놓고 보니 한 번도 길 같은 건 잃어본 적 없이 내비게이션을 따라 정해진 길을 안전하게 정주행 해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무수히 많은 차별을 당해왔고 반대로 차별을 자행해 왔는지 이제는 안다. 그러나 일일이 짚어가며 설명할 시간도 재간도 없으므로 그저 인생 처음으로 소수자가 됐던 강렬했던 경험부터 털어놓고자 한다.
때는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초등학교 입학부터 고등학교 졸업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반장을 도맡았고 공부도 잘했고 달리기도 글쓰기도 발표도 아무튼 다 잘해서 늘 상장과 주목을 넘치게 받는 그러니까 소위 엄친딸 같은 애였다.(재수 없어하실 필요 없어요. 지금은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ㅋㅋ) 중학교 2학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거라면 나 포함 친구들 모두 사춘기가 심해졌다는 것뿐. 그 때문인지 전과 다르게 나를 고깝게 여기기 시작한 애가 있었으니 초등학교 때 단짝이자 그 당시에도 같은 무리에서 놀던 S였다.
S는 성적은 썩 좋지 않았지만 무척 예쁘고 사교적인 애였다. 사실 S는 그전에도 뭔가 자기 맘에 안 들면 친구들을 한 명씩 돌아가면서 왕따 시키는 여왕벌 노릇을 했었다. 애들은 자신이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서로를 따돌려야 했다. 걔가 지목하는 애와는 밥도 같이 먹어선 안 되고 화장실도 당연히 같이 가면 안 되고 말도 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도 그 안에서 무력한 방관자였다. 나는 왕따로 지목된 아이와 인사도 하고 대화도 나누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의 편에 서는 행동은 하지 않았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내 차례가 왔다. 인생 처음으로 왕따가 됐다. 한 번 왕따가 되면 보통 1-2주 정도 지속이 됐던 것 같은데 나의 경우에는 달랐다. 나는 꽤 오래 그 무리에서 왕따를 당했다. 왜냐면 왕따가 된 사람은 S에게 어떻게든 다시 잘 보이려 굽실대며 온갖 비굴한 모습을 보여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S가 나를 왜 왕따로 지목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S가 열심히 준비했지만 결국 망친 중간고사에서 내가 올백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예측한)다. S의 엄마는 무척 치맛바람이 센 아줌마로 그 당시에도 학부모회장 같은 걸 도맡는 사람이었는데 걔네 엄마가 초등학교 때 단짝이었던 나와 S를 비교를 했던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게 도화선이 됐을 거라는 걸, 고작 열다섯이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미친년, 지가 공부 못하는 걸 왜 나한테 지랄이야. 썩을 년’
아무튼 나도 보통 애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늘 함께 급식을 먹던 친구들이 나만 빼놓고 우르르 나가거나 아무도 나에게 먼저 말 걸지 않고 인사라도 할라치면 눈길을 피하고 모른 척하는 건 사사건건 상처였다. 심지어 그 무리와는 학원도 같아서 따돌림은 학원에서도 이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학원은 성적별로 분반이 되는 시스템이라 수업 시간은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지만, 매점에 가거나 학원 차를 탈 땐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했다. 어느 날은 집에 가기 위해 학원 버스에 앉아 있는데 그 무리와 친한 일진 같은 애가 나를 향해 고함을 쳤다. “아, 강윤이 존나 싫어!”
걔는 나랑 전혀 친하지 않았던 그러니까 내가 싫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애였다. 그냥 내가 동네북이 되었구나, 이런 게 바로 왕따라는 거구나, 뼛속 깊이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 일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 건 수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그 차 안에서 내가 짝사랑하던 남자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얼마나 내 자존심에 깊은 스크래치를 남겼는지 여전히 그 시공간의 공기가 생생하다. 어찌나 분했는지 그 애 이름이랑 얼굴도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소수자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왕따라는 낙인 그 자체로 다시 따돌림을 받을 이유가 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학교 역시 하나의 작은 사회. 여왕벌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있다면 그런 걸 꼴 보기 싫어하는 애들도 분명히 있다. 나는 그런 평화주의자 셋이 모여 알콩달콩 노는 무리에게 은근슬쩍 추파를 던졌고 그 애들은 모른 척 나를 친절하게 받아주었다. 분명 내가 무리에서 왕따를 당하는 줄 알았을 테고 그 무리가 꽤 힘이 세다는 것도 알았을 텐데도 모든 위험 요소를 부담하고 나를 받아준 눈물 나게 고마운 친구들. 유쾌하고 귀여운 애들이라 우리는 금방 친해졌고 나는 그때가 중학교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던 때라고 추억한다.
나는 나를 따돌린 그 무리를 완전히 잊는 것으로 역으로 그들을 따돌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왕따로 지목된 내가 하하 호호 웃으며 잘 지내기 시작하자 그 무리에선 혼선이 벌어진다. 나를 모른척했던 아이들이 갑자기 슬슬 한 명씩 내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고 슬쩍 말을 건네거나 같이 매점에 가자고 하기도 했다. 나는 반갑게 그들의 인사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 무리와 다시 친하게 지내진 않았다. 나에겐 이미 진짜 친구가 생겼으니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무리는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마치 권선징악처럼 여왕벌 S가 왕따가 되었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됐는지는 자세히는 모른다. 늘 반짝반짝 빛나던 S가 잔뜩 움츠러든 어깨와 주눅 든 표정으로 걸어갈 때면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기억만이 날 뿐.
그렇게 처음으로 소수자가 됐던 추억을 떠올려 보니, 차별이라는 건 단지 ‘소수자’ 혹은 ‘사회적 약자’로 불리는 특정 집단에만 한정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의 삶을 구성하는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우리는 소수자가 될 수 있고 어쩌면 우리는 누구나 소수자라는 것.
열다섯 왕따를 당하는 소수자였던 나는 지금 서른일곱의 암 환자라는 소수자로 살고 있다.
암 환자라는 소수자는 왕따를 당하는 소수자만큼이나 상처받을 일이 많다. 그중에서도 ‘이러다 암 걸려 죽겠다’라는 표현을 들을 때면 낯빛이 화끈거리고 가슴에 불을 지핀 것처럼 화가 난다. 암 환자가 되기 전부터도 불편했던 표현이지만 암 환자가 되고 나서는 ‘이 드라마 보다가 암 걸려 뒤질 뻔’ 같은 댓글을 볼 때면 내가 진작 죽을 사람인데 어쩌다 아직 살아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암 환자들은 누구나 힘든 치료 과정을 겪었고 잘 끝났더라도 혹시나 앞으로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산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한 나에게는 한없이 무거운 그 단어를 누군가는 너무 쉽게 말한다는 서운함이나, ‘암환자=죽는다’는 공식처럼 들리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가벼움에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나고 가끔은 생채기로 남는다.
하지만 그 단어가 나에게 불편하니까 쓰지 말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모두 죽게 마련이니 ‘힘들어 죽겠다’ 이런 말도 쓰면 안 되는 것이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고 예민하다고 따질 수도 있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딱히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무슨 말을 하든 모두 그들의 자유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그렇게 반박하고 따지는 사람이 만에 하나 암에 걸렸을 때 그 앞에서 ‘암 걸려 뒤질 뻔’하고 말하면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박하고 따질 확률은 거의 100%..
김지혜 작가님이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책 소개에선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스스로가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내가 원래 결정장애가 심해서..”
“요즘 얼굴이 너무 타서 동남아 사람 같아.”
“여자들이 원래 수학에 좀 약하지 않나?”
이런 말이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가? 우리 모두에게는 차별감수성의 사각지대가 있다.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듯, 어떤 차별은 보이지 않고 심지어는 ‘공장함’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왠지 불편한 이 차별의 말들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왜 익숙하게 사용되는 걸까? 때로는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벼야 할 때가 있다. 차별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없는 세상에서,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자세!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고 있는 지금,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에게 고한다.
“암 걸려서 뒤질 뻔” 같은 이야기 웬만하면 하지 마세요. 표현의 자유를 지키면서도 품위 있는 언어생활을 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본인이 진짜 암에 걸리길 바라시는 건 아니실 테니까요?
암에 걸리고 나서야 나는 공동체의 일원을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됐다. 더 나아가 누군가가 나에게 해줬으면 좋겠는 배려와 친절을 미리 베풀기도 한다. 왜냐면 우리는 모두 언제 어디서나 어떤 모습으로든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게 됐기 때문이다.
여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신으로 살아온 전혀 선량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언제 어디서나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고려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안 차별주의자이기도 한 나란 사람.
그래 나는 바로, 안 선량한 안 차별주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