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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Aug 13. 2024

INFJ 암환자의 ‘암밍아웃’에 대한 단상

episode 9.

  



암밍아웃?  



처음 암 진단을 받고 암 환우들이 모여있는 카페의 글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있던 때에, ‘암밍아웃’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임밍아웃’이라는 신조어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비슷한 구성의 신조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하지만 두 단어, 달라도 이렇게 한참 다를 수가. 마치 얼굴은 비슷하게 생겼지만 성격은 아예 딴 판인 쌍둥이 같은 느낌이랄까.       



‘임밍아웃’은 임신과 커밍아웃의 합성어로 임신 소식을 알리는 일을 말한다. 내가 딸아이를 임신했을 십 년 전 만 해도 그런 말은 없었지만(있었나? 나만 몰랐던 건가?) 어느 날부터 임밍아웃이라는 단어를 너도 나도 앞다퉈 사용하기에 저절로 알게 된 단어였다.

맞다. 그러니까 저 공식을 대입해 보자면 ‘암밍아웃’은 ‘암’과 ‘커밍아웃’의 합성어로, 암에 걸린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밝힌다는 의미를 가진 신조어인 것이다.


참. 세상이 얄궂기도 하지. 한창 임밍아웃을 해야 할 나이에 암밍아웃을 해야 한다니. 더구나, 심지어, 이제는 더 이상 임밍아웃 같은 건 절대로 할 수 없는 몸이 된 채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암밍아웃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암밍아웃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한 번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쓴다. 글의 말미에는 어떤 결론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1. 사람을 믿지 않는다.

우선 여기서 MBTI부터 밝히고 시작해야겠다. 나는 스무 살 신입생 시절 교양수업에서 시행했던 정식 MBTI 검사부터 얼마 전 딸아이가 억지로 시킨 인터넷에서 무료로 할 수 있는 약식 MBTI 검사까지 아무튼 검사할 때마다 족족 변함없이 INFJ가 나오는 찐 인프제인간이다. 인프제의 큰 특징 중 하나가 ‘힘든 일은 절대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만일 인프제가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꺼냈다면 그건 이미 해결된 일일 가능성이 거의 백 프로일 정도라고. 기저를 따져보자면 각자의 배경마다 이유가 다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우선 사람들의 ‘입’을 믿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다.

내가 사람으로서 가장 미덕으로 두는 것 중 하나가 ‘입이 무거운 것’인데 살면서 진정 입이 무거운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입이 가벼운 경우는 많았지만, 좋은 성품을 가짐과 동시에 입이 무거운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으니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비밀로 지켜지길 바라는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아프다는 사실이 여기저기 알려지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암 진단 소식은 가족에게만 오픈했었고, 절친한 친구들에게도 모든 치료가 끝난 후에야 이야기를 했다.

재밌는 건 친구들은 대강 눈치를 채고 있었음에도 ‘어차피 쟤가 이야기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다렸다는 것. 정말 나를 잘 아는 오랜 친구들 다운 면모라는 생각이 든다.      



2. 사람을 믿지 않는다(2)

그렇다면 나는 왜 내가 아프다는 사실이 알려지길 바라지 않았을까?

가장 먼저 단순하게 드는 생각은 동정받는 게 싫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강한 성격 탓에 평생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싫은 소리 안 들으며 살려고 얼마나 답답하고 꼿꼿하게 살아왔던가. 그런데 갑자기 단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한순간 가여운 사람이 된다는 게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암 진단을 받기 딱 일 년 전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내 나이 또래로는 드물게 모친상을 치렀고, 안 그래도 ‘아이고 딱해라. 불쌍해서 어쩌니’하는 이야기를 신물 나게 들었기 때문에 더욱 방어기제가 발동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 좀 들으면 뭐 어때?

진심으로 안타까워 위로하고 싶은 연민의 마음까지 폄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동정과 연민은 엄연히 다르다. 연민(compassion)은 ‘고통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어원 ‘pati’와 ‘함께’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어원 ‘com’이 합쳐진 단어다. 즉, 고통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연대의 감정인 것이다. 하지만 동정(pity)은 우월감을 가진 채 거리감을 두고 타인의 고통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대상의 고통은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앞으로도 겪지 않을 고통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내게 보내는 마음이 그저 값싼 동정이 아니라 진심 어린 연민이라면 백번 천 번 감사히 받겠지만 나에게 보내는 마음이 동정일지 연민일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거늘!

내 불행이 누군가에게 가십거리 혹은 자신의 안위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수단이 되는 게 너무 싫었다. 위선적인 위로일지 아닐지 일일이 구별할 수도 없고 그럴 체력도 시간도 없었고.

그러니까 동정받는 게 싫어서 연민까지도 포기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버린 것이다. 난 동정은 딱 질색이니까.



3. 사람을 믿지 않는다.(3)

그렇다면 나는 왜 이리도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걸까?

사실 이 부분이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자 저 깊은 곳 기저 어딘가에 꽁꽁 숨겨둔 마음이지 않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씩은 악하고 조금씩은 선하다.

그렇기에 눈앞에 불쌍한 사람들 가령 가난하거나 아프거나 재난으로 터전을 잃었거나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하는 일들을 벌어지면 안타깝게 여기고 도와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순간 쏟던 관심은 이내 거두어질 것이고 곧 누구나 자신의 일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데 집중할 것이다. 내가 언제 안타까운 마음을 품었었나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는 일들에 정신이 팔린 채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기왕이면 밝은 쪽을 향하는 것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니까. 물론 나도 그래왔고.

그렇기에 나는 암밍아웃 이후 연민이든 동정이든 쏟아지는 관심을 받고 난 ‘그 이후’가 두려웠던 것 같다.

처음에는 다들 놀랄 것이고 힘내라는 응원과 지지를 보낼 것이고 나를 편안하게 해 주려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 몫의 위로가 끝나면 그들은 지리멸렬한 투병기나 눈물 나는 신파보다는 누군가의 산뜻한 여행기나 귀엽고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를 궁금해할 것이다. 그게 너무 당연한 것이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내심 상처받을 것이 너무나 명징했다.

그래서 아주 진부하지만,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암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말았다.      



암환자가 되기 전에, 임경선 작가의 에세이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구절이 있다.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퇴원한 바로 다음 날, 함께 있던 친정엄마가 네 살 터울의 언니가 출산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언니를 만나러 가 버리자 상실감에 큰 상처를 받았다고 고백한 일화였다.

그 아무리 엄마라도, 내 자식이 암에 걸려서 아파도, 다른 자식이 낳은 사랑스러운 아기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게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어쩐지 초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 몫의 불행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며 반드시 홀로 견뎌야 하는 고통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그때가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즈음.

‘기쁜 일은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픈 일은 나누면 약점이 된다’라는 말에 공감하며 거의 전생에 쇼펜하우어였던 것처럼 지냈던 것이 내가 점점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모두 종합해 보면, 나는 사람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임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왜 지금 여기 브런치에서는 암밍아웃도 모자라 이렇게나 열심히 암 경험자로서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아마 그건 사람을 믿지 않는 마음 이면에 사람을 너무나도 믿고 싶은 마음이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히틀러와 예수의 교집합이라는 나는야 어쩔 수 없는 INFJ..)



사실 앞에서 사람들은 기왕이면 밝은 쪽을 향한다고 말했지만, 그건 모두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어두운 곳에 자신의 밝음을 끌고 들어가 그 어둠을 밝히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자신의 몸을 태워서라도 주위를 따뜻하게 만드는 촛불 같은 사람도 분명히 존재한다. 쉽게 남을 동정하지 않고 존중할 줄 알며, 편견에서 자유롭고 의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기왕이면 밝은 쪽만을 원했던 사람이라서, 그래서 내가 사람들을 더 믿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나 스스로도 나를 믿을 수 없으니 인간을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여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브런치에 암 투병기를 연재하며 나는 사람을, 이 세상을 믿고 싶다는 마음이 초봄의 새싹처럼 조금씩 천천히 매일매일 자라나고 있다.

왜냐면 내가 부단히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고 실제로 조금씩 좋은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추구미인 ‘남을 쉽게 동정하지 않고 존중할 줄 알며 편견에서 자유롭고 의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불철주야 내 몸과 마음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열심히, 진심을 다해 보고 듣고 읽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소수자의 삶에 대해서 이해하고 포용하는 능력은 그전에 비하면 놀랄 만큼 크게 성장했다!)      


그러니까

언젠가 어느 날 최고로 빠른 시일 내에, 스스로 인정할만한 좋은 어른이 된다면, 그래서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때는 마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아주 산뜻하게 고백하고 싶다.           



“네 맞아요. 사실 저 암 환자예요. 찡긋!“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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