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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Aug 06. 2024

비건이지만 밥은 같이 먹고 싶어

episode 7.



“비건? 강윤이 니가 비건이라고?”



오랜만에 평양냉면을 먹자며 만난 친구는 놀라서 되묻는다. 편육을 하나 더 시키려던 손을 급하게 내리며.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 아무 때고 너 지금 제일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면

항상 ‘구운 고기’라고 답할 정도로 고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엄밀히 따지면 비건은 아니고 페스코야'

라고 정정해 주고 싶었지만 비건이나 페스코나 친구에게는 똑같이 충격적인 일일 테니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비건’은 육류와 생선은 물론 우유와 동물의 알, 꿀 등 동물에게서 얻은 식품을 거부하고 완전히 식물성 식품만 섭취하는 채식주의자를 말하고 ‘페스코 베지테리언’은 육류는 먹지 않지만 어패류, 달걀, 유제품 등은 섭취하는 채식주의자를 의미한다.)

더구나 동물권의 신장이든 기후 위기의 회복을 위함이든 그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시작한 비건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멋쩍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단지 건강 때문에 채식을 선택했을 뿐이니까.           



암 치료 종결 이후, 식단에 부쩍 신경을 쓰게 됐고

뭘 먹느냐보다 뭘 먹지 않느냐를 중요하게 따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채식주의자가 된 것이다.

육류 외에도 인스턴트나 가공식품, 과자, 아이스크림, 탄산음료 등 아무튼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은 아예 먹지 않는다. 물론 밀가루는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어 종종 기분 내고 싶은 날엔 먹지만.

이렇게 2년 가까이 채식을 하다 보니 스스로 몸이 가볍고 속도 말끔한 기분이 들어 좋았고 목적이야 오로지 나를 위한 행위였지만 결론적으로는 무엇도 해치지 않는 방향이라는 게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 가족(나, 딸, 남편) 중 혼자 채식을 하니 외식 메뉴 선정에는 늘 적절한 타협과 양보가 필요했다.

우리 가족은 파스타와 초밥을 좋아하고, 칼국수나 냉면 같은 면 요리도 종종 먹고, 허름하지만 엄청 유명한 백반집이나 두부전골 같은 걸 찾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고깃집은 선뜻 입에 잘 오르내리지 못하는 후보였던 것.



그러던 어느 여름 주말, 교외 외식 타운을 둘러보며 저녁 메뉴를 고르던 와중 고풍스러운 자태의 한옥집 담을 넘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숯불 갈빗집의 자글자글 고기 굽는 냄새와 하하 호호 듣기 좋은 사람들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흘러 흘러 우리 앞에 멈췄다.

손을 잡고 같이 걷던 열 살짜리가 꿀꺽 침을 삼켰다.

물론 아이에겐 집에서 고기로 요리를 해서 주지만 외식으로 먹어본 지는 꽤 오래됐던 터라 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고기를 먹지 않는 엄마를 위해 차마 말은 못 하고 기웃기웃 엿보는 게 귀여워



“오늘은 갈빗집에 가볼까?” 하니 눈이 동그래져서 “진짜 그래도 돼?”한다.

“그럼 그래도 되지!”


 

마땅치 않아 하는 남편을 이끌고 갈빗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갈비 넉넉히 그리고 내가 먹을 된장찌개를 시켰다.

활짝 열려있는 창문 밖으로 너른 잔디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한눈에 보였다.

이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배부르겠단 생각이 들 찰나 테이블에 깔리는 반찬을 보는 순간!

배에서 꼬르르륵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구수한 향과 색을 뽐내는 된장찌개, 먹음직스러운 삼색나물 반찬과 호박잎 무침, 오색찬란한 잡채, 콜리플라워 볶음, 상추 겉절이, 열무김치, 양파 절임, 흑임자 참깨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 상추, 깻잎, 치커리, 적근대, 로메인, 다채 등 다양한 쌈 채소와 곁들어 온 고추까지.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가짓수가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게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운 차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두 직접 키운 재료들로 차린 한 상이라고.

자부심이 느껴지는 음식의 맛은 또 얼마나 훌륭한지, 고기 한 점 먹고 싶단 생각은 들어올 틈도 없이 쌈 채소에 토종 된장을 야무지게 넣어 와구와구. 나물 반찬, 된장찌개로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비건도 행복할 수 있는 고깃집이라니!

그렇게 이 한옥 갈빗집은 우리 가족의 유일무이한 고깃집이 되어버렸다.      

물론 불판을 교체하거나 고기 굽는 걸 도와주실 때, 남는 고기들을 몽땅 내 앞 접시에 놓아주며

‘엄마는 왜 이렇게 고기를 안 먹느냐’ 걱정하시는 사장님의 질문엔 미소로 답할 수밖에 없다는 게 꼽자면 유일한 단점이긴 했지만.           




운명처럼 단골 고깃집을 만났던 그 여름의 끝 무렵, 우리 가족은 싱가포르에 가게 됐다.

대학 때 교환학생으로 만났던 내 친구 사라의 결혼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과에는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이라는 전공 수업이 있어서 실습을 위해 교수님이 임의로 짝을 지어주었는데 내 짝이 바로 사라였다.

사라와 나는 기숙사에서 치킨을 시켜 먹으며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거나 학교 앞에서 사라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음식인 삼겹살을 굽거나 남산타워에 가서 돈가스를 사 먹기도 했다.

한국어는 하나도 배우지 못하고 싱가포르로 떠난 사라는 내가 결혼하게 됐을 때 휴가를 내고 부모님과 함께 참석해 주었다.

그때의 나는 스물여섯.

십 년이라는 시간이 마치 반나절처럼 훌쩍 지나 서른여섯이 된 내가 사라의 결혼식엘 가게 된 것이다.      



사라가 이메일로 보내준 초대장에 회신을 보내는데, 식단을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었다.

비건, 할랄, 글루텐 프리, 너트 프리, 그 외 옵션까지.

덕분에 나는 구구절절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약속 전 미리 식사하지 않아도, 대충 먹을 결심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드는 걸 보니 비건으로 살아가며 ‘함께 먹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사라의 결혼식에서 제공받은 중국식 비건 식단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맛있었다.

대나무에 담겨 나온 야채 튀김과 야채 만두찜, 샐러리를 넣은 채식 새우와 송로버섯 소스, 토마토를 넣어 만든 버섯 조림, 망고와 파인애플이 들어간 볶음 요리, 연잎으로 감싸진 볶음밥, 복숭아 디저트까지.

친구 결혼식 가서 축하만 많이 해주면 되지 밥 맛있게 먹는 게 무슨 대수냐 생각했는데 축하도 하고 밥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 더욱 행복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결혼식 다음 날 저녁, 사라는 신랑을 소개해 주겠다며 우리가 묵는 호텔 근처의 식당으로 우리를 불렀다.

찾아가 보니 그곳은 유명한 비건 레스토랑.

나와 사라를 제외하고 모두 서로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우리는 마치 오래 알던 사이처럼 수다를 떨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사라는 나에게 왜 비건이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한국에서 함께 그렇게 많은 치킨을 시키고 삼겹살을 굽고 돈가스를 먹었는데도 말이다.

사라에겐 내가 비건이건 아니건 그저 함께 즐거운 식사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 보였다.

모두 편안하게 음식을 나누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더 나아가 이상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순간, 우리 동네 한옥 갈빗집이 생각났다. 식당이라는 것 외엔 공통점이 없어 보였지만 그 두 곳에서 나는 비슷한 결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함께 음식을 나누고 있다는 연결감 같은 것.

그렇구나. 내가 소망하는 건 다시 논비건이 되어 제약이 없는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비건과 논비건이 함께 행복한 식사를 하는 것이구나. 그러니까 고기를 먹는 행위를 소망한 게 아니고 그저 밥 먹다가 외롭거나 화나거나 억울하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었다는 것.

그건 앞으로도 지난하게 이어질 나의 삼시세끼 역사에 너무나 희망적이자 고무적인 깨달음이었다.  



     

싱가포르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며

나는 내가 비건이 된 것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번에 못 먹었던 편육 먹으러 의정부 평냉 고?”      



친구는 비빔냉면에 편육을 시켰고 나는 물냉면을 먹었다.

메뉴 선정만큼이나 우리는 다른 사람이지만 그래도 상관없이 즐거웠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에 무너지지 않고 서로의 신념을 왜곡하거나 오해하지도 않고,

그저 서로와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며 행복했으니까. 게다가 맛있었고!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같이 먹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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