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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Aug 01. 2024

바야흐로 방사선 치료의 계절(2)

episode 6-1




가을은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계절이다.

우리 부부가 결혼식을 올린 때도 가을이고,

그 이듬해 아이가 태어난 때도 가을이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아이의 태명도 ‘추추’였다.

‘가을에 결혼한 부부가 가을에 낳는 아이’라는 뜻으로

 ‘秋’ 자를 써서 만든 태명.

가을은 그렇게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과 딸아이의 생일날이 있는 계절이 되었고

항상 그 핑계로 공식적인 여행을 떠나는, 그야말로 계절의 모습을 닮은 풍성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방사선 치료를 9월에서 10월 두 달 동안 매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더욱 마음이 가라앉기도 했었다. 그 어느 때든 암이 반가울 리는 없을 테지만 이 아름다운 계절에 들어서기엔 더욱 잔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나마 주치의 선생님이 직장생활과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시는 분도 계실 만큼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다독여주셔서 안심이 됐다.

하지만 그건 나의 바람이었을 뿐.

엄청난 피로감과 식욕부진 때문에 치료를 다녀오면 소파에 하릴없이 누워만 있었다.

치료 횟수가 누적될수록 부작용은 점점 더 심해졌다. 타고나길 저체중인지라 먹지를 못하면 힘을 못 쓰는 스타일인데 식욕부진으로 제대로 못 챙겨 먹으니 힘이 하나도 없었고, 치료 중반부 이후부터는 설사가 너무 심해 장시간 외출이 힘들 정도였다.

오전에는 소변 참기에 몰두하고 있다가 오후에는 배가 아파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갔다.

마치 신생아처럼 먹고 자고 싸는 것만 신경 쓰며 살다 보니 이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행위들이 늘 정상범위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는 게 얼마나 감사했던 일인지.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상투적으로 말해왔지만 이처럼 몸으로 체감하는 순간은 또 처음이었다.           




방사선 치료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치료실로 가서 방사선사님의 안내에 따라 치료를 받는다.

아침 9시 30분, 양성자치료센터로 출근을 해서 환자 카드를 찍고 출석 체크를 하면 대기자 명단 화면에 내 이름이 뜬다. 이름을 확인하고 탈의실로 가서 바지와 속옷을 탈의하고 치료용 하의로 갈아입는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충동을 열심히 참아가며 대기하고 있으면 치료실 앞으로 이동하라는 안내가 나온다.

다시 치료실 앞에서 대기하면 방사선사님이 나를 불러주시고 기계에 올라 누우면 조사 부분에 맞춰 자세를 맞추고 치료는 시작한다.

방사선 치료를 할 때 그 공간에는 오로지 나 혼자이기 때문에 기계에 올라서자마자 자동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는데(나는 무서우면 늘 눈을 감는다) 방사선 치료 28회를 진행하면서 치료 중에 한 번도 눈을 뜬 적이 없어서 그 기계 안이 어떤 모양인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그냥 공기로 소리로만 그 공간을 느꼈을 뿐.

그래도 후반에는 꽤 익숙해져서 어느 날에는 기도를 하기도 어느 날에는 속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또 어느 날에는 점심 메뉴를 고민하기도 했다.


내 치료 앞 순서는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얗게 센, 80세가 훌쩍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의 치료 시간이라 치료가 끝나고 나오시는 모습을 항상 마주쳤다. 젊디 젊은 나도 이렇게나 힘든 치료를 마치고 나오시는 할아버지의 표정은 언제나 온화했다. 그 표정이 너무나 굳건해 보여서 치료실로 들어가는 내 마음도 덩달아 씩씩해질 정도로. 언젠가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울고 싶을 날에는 그 할아버지의 온화하고 굳건한 그 표정을 따라지어보곤 했었다.


      


그렇게 치료를 이어가며 일주일에 한 번 꼴로 피검사를 하고 주치의 선생님과의 면담시간을 갖는다.

면담에 가기 전에 메모장에 적어둔 주로 부작용과 관련된 궁금증들을 여쭤보면 선생님은 소상히 답해주셨다. 나는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혼나고 친구랑 싸우고 집에 와서 엄마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초등학생처럼 얼마나 툴툴댔는지 모른다.

‘좀 괜찮아요?’ 하고 물으시면 항상 ‘아니오 선생님 저 너무 힘들어요’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치료가 절반쯤 지났을 무렵인가 나의 면담 앞 순서에 새로운 환자가 배정이 됐다.

내 또래로 보이는 엄마와 아빠가 내 딸아이의 또래로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셋이 면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들고 있는 인형이 우리 딸아이의 인형과 똑같아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 아이를 따랐다.

처음엔 우리 딸도 가끔 내 치료를 따라왔기 때문에 아이도 엄마나 아빠를 따라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그 아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oo아, 들어가자’라고 했기 때문에 그 아이가 소아암 환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매일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도 그때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그 아이는 언제나 차분하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진 아이였다.

대기가 길어져도 한 번도 보채는 일 없이 항상 얌전하게 앉아 엄마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면담이 끝나고 나올 때도 표정 한 번 찡그리는 걸 본 적이 없다.

나는 대기가 길어지면 매번 한숨을 푹푹 쉬고 면담에 들어가선 한껏 징징대고 나와서도 울상이기 일쑤였는데.. 아이를 마주친 날부터는 어쩐지 너무 부끄러워 어울리지도 않은 쿨한 척을 하곤 했었다.      


그러다 치료 횟수가 20회쯤 지났을 무렵, 누적된 치료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때였다.

에라 모르겠다,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으니 치료 횟수 좀 줄여달라고 말씀드리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대기 의자에 앉아있던 날.

엄마 아빠와 커플 모자를 예쁘게 맞춰 쓰고 양손을 꼭 붙들고 면담실에서 나오는 아이의 그 반짝이는 눈빛과 담대한 모습이 나를 계속 버티게 만들었다.




치료 앞 순서였던 할아버지의 온화하고 굳건한 표정, 면담 앞 순서였던 어린이의 차분하고 담대한 태도가 두 달 동안 매일같이 이어진 방사선 치료의 여정을 견디게 해 준 큰 힘이자 영감이 되었었다고,

이제 와서야 뒤늦은 고백을 한다. 정말 감사했다고, 앞으로도 내내 건강하자고.      




감사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으려다 보니 미처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생각난다.




방사선 치료를 받기 전 병원에서 영양 상담을 따로 해주실 정도로 치료 중에는 식단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는데 나는 따로 챙겨줄 이가 없어서 내가 스스로 챙겨 먹거나 사 먹어야 했다.

혼자 치료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온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리는 언감생심 그냥 반찬 배달로 버텨야겠다 생각한 것도 잠시, 근처에 사는 사촌 언니가 친정엄마처럼 매번 반찬을 해서 배달해 주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날엔 병원에도 같이 가주고 집까지 데려다주고 먹고 싶다는 건 뭐든지 만들어다 준 나의 사촌 언니.

언니는 네덜란드에서 지내다가 이번에 한국으로 돌아오며 우리 집 근처에 살게 되자마자 내가 아프게 되면서 언니가 치료 내내 나를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언니에게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아 고마운 마음만큼이나 미안한 마음을 내비칠 때면 언니가 말했다.

     


“예전에 네덜란드에 있을 때 숙모랑 통화를 했었거든. 내가 한국으로 들어가면 강윤이네 집 근처에 살게 됐다고 하니까 잘됐다며 기뻐하셨는데 그 짧은 말속에서 ‘우리 강윤이 잘 부탁한다’는 엄마의 염려와 사랑이 너무 크게 느껴졌었어. 그래서 숙모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내가 곧바로 기도했거든. ‘숙모, 강윤이는 내가 잘 챙길 테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하고. 그러니까. 고마울 필요도 미안할 필요도 없어.”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차 안에서 어찌나 울었던지.

엄마가 보내준 나의 천사 진이언니에게 너무나 고맙다.      



그리고

배우자를 멀리 떠나보낸 마음을 다 추스리기도 전에 큰 딸아이의 투병으로 그 누구보다 힘들었을 우리 아빠.

내가 투정 부리는 날엔 열 일 제치고 먼 길을 달려와 병원에도 같이 가주고, 딸은 물론 손녀까지 챙겨주고, 무엇보다 내가 우는 것도 묵묵히 다 들어주었다. 유일하게 누군가의 앞에서 편하게 울 수 있는 존재가 아빠라는 것이, 그런 아빠가 내 곁에 건강하게 있다는 것이,

그 자체가 나에게는 태산같이 큰 힘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방사선 치료를 하던 중에는 아이의 생일도 있었고 우리의 결혼기념일도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아니 어쩌면 조금은 예상했던,

시아버지의 장례식이 있었다.      

요양병원에서 의식이 없으신 채로 꽤 오래 누워계시던 시아버지가 내가 치료를 마치기 꼭 일주일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시아버지는 외국에서 주로 생활하셨기에 자주 뵙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보내드리게 되니 마음이 많이 아팠고, 며느리로서 시아버지 가는 길에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아 죄책감이 심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하늘나라로 가면서 강윤이 너 아픈 것까지 다 가지고 가라고 했다고 기도했으니 아픈 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주셨고, 남편은 가장 힘들었던 치료 마지막 일주일 동안 강윤이 네 옆에 있어주라고 아빠가 지금 이때를 골라 가신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아버님께 늘 감사했다고 이 글에서도 꼭 한 번 말하고 싶다.




그렇게 많고 많은 사람들의 가호로 나는 무사히 방사선 치료를 마쳤고, 도저히 지날 것 같지 않던 가을이 어느새 저물고 있었다.

바야흐로, 방사선 치료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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