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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Jul 23. 2024

서른다섯의 슬기로운 요양병원 생활

 episode 5.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시댁으로 향했다.

시댁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2층이라 내가 아이를 보러 집으로 올라갈 수가 없어서 차에서 만났다.

아이는 내 품에 파고들어 안기고 싶어 했지만 환부 때문에 그조차 할 수 없었다. 일주일 만에 만난 엄마 손에 눈을 파묻고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나도 눈물이 나는 걸 꾹 참았다.

아이는 엄마랑 헤어지기 싫어 내가 입원하기로 한 요양 병원까지 따라와 나를 배웅해 주고 떠났다.

내 아이가 요양 병원으로 나를 배웅해 주는 그림은 한 오십 년은 지나야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른다섯 엄마를 요양 병원에 데려다주는 여덟 살이라니. 세상은 요지경.      



퇴원은 했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화장실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겨우 하는 형편이라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간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편은 그동안 검진과 수술에 따라다니느라 더 이상은 휴가를 쓸 수 없어 회사에 나가야 했고, 친정 아빠도 마찬가지. 설령 휴가를 쓸 수 있다고 해도 요리도 못하는 아빠가 내 간병을 하기엔 무리였다. 시어머니는 우리 딸아이를 돌봐야 했고 동생들도 애 키우고 자기 삶을 살아내느라 버거운데 언니 병간호는 무슨.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수순으로 나는 요양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그 요양 병원은 한의사인 남편의 사촌 형수가 한방 진료를 담당하고 계신 곳이라서 소개를 받아 가게 됐다.

‘요양’이라는 이름이랑은 별로 안 어울리는 강남역 사거리 한복판 고층빌딩에 있는 병원이었다.

강남역은 남편과 처음으로 만났던 소개팅 이후로 거의 십 년 만이었다. 이십 대의 소개팅 남녀로 찾았던 이곳을 암환자와 그의 보호자로 다시 찾다니.

역시나 세상은 요지경.  

그래도 강남역은 남편 회사와도 가깝고 아이가 지내고 있는 시댁과도 멀지 않아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드는 위치기도 했다. 그리고 요양병원이 어디든 간에 가기 싫은 건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퇴원 수속을 밟자마자 다시 입원 수속을 밟았다.

그 당시 내가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건 바로 머리를 감는 일이었다.

하루만 머리를 감지 않아도 기름이 나일강처럼 흐르는 지성피부라 벌써 나흘은 감지 못해 떡진 머리가 환부보다 더 불편한 지경이었다. 다른 유명한 요양병원에서는 머리를 감겨주는 샴푸 서비스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 요양병원은 왜인지 그런 (중요한) 게 없었다.

다만, 외부인 출입금지임에도 (또) 우리 남편만 ‘특별히’ 함께 욕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겨주는 걸 허락해 준다고 했다.      



남편은 나의 떡지고 냄새나는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감겨주었다. 새삼 이것이야 말로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남편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야무지게 드라이기로 머리까지 말리고 나니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병원 앞에서 아이와 헤어지며 가라앉았던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머리 한 번 감았다고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새삼 내가 의외로 단순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남편을 보내고 입원용 캐리어를 끌고 내 이름이 적힌 병실을 열고 들어갔다. 병원에서는 1인실에 있을 수 있었지만 요양병원 1인실은 부담이 되어 4인실을 배정받았는데 우리 병실에는 두 분이 계셨고 나까지 세 명이 병실 메이트가 되었다.

내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두 분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흘깃흘깃 지켜보고 있었다. 같이 들어간 실장님이 간단하게 짐정리를 해주시고 침대에 나를 눕히고 나가시는 순간 그 어색함을 뚫고 질문이 날아왔다.


      

‘반가워요~ 너무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에요?’

‘안녕하세요! 저 서른다섯이에요.’

‘어머 우리 딸이랑 나이가 비슷하네. 근데 어디가 아파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분이 어깨를 툭 치며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아니야’ 속삭이듯이 타박을 하셨다.

직계가족 외에는 수술 사실을 비밀로 부쳐두고 1인실 생활만 고집하며 철저하게 회피와 방어의 자세를 갖추고 있던 나였는데, 이상하게 그분의 질문에는 불편한 마음이 하나도 안 들고 말이 술술 나왔다.

그게 그저 일주일 동안 이곳에서 잘 지내고 싶은 입원 새내기의 사회생활이었는지 아니면 같은 아픔을 공유했다는 동병상련의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양병원에서의 첫 단추는 제법 잘 끼운 것 같았다.

이제 막 수술을 마치고 온 젊은 암환자 답지 않게 밝아 보인다며 나를 예뻐해 주셨다.       



한 분은 식도암으로 또 다른 한 분은 유방암으로 수술과 치료를 마친 지 1년쯤 지난 분들이셨는데, 몸이 안 좋을 때마다 요양 병원에 입원해 보조 치료를 받고 계셨다. 지금 현재는 위기를 한고비 넘긴 상태이시라 그런지 다들 여유가 있으셨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요양병원에 오기 싫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렇게나 아프고 우울한 때에 나보다 더 아프고 우울한 사람을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는 괴로움 때문이었는데, 이렇게 프레시한 요양병원이라니.

덕분에 나는 빠르게 요양병원 생활에 적응을 해나가고 있었다.       



같이 지내는 분들과 적응도 잘했고, 맛있는 밥 차려서 침대로 가져다주시고, 간식도 챙겨주시고, 수술 부위 소독도 해주시고, 마사지도 해주시고, 불편한 점이 없도록 살뜰히 잘 챙겨주셨지만 첫날부터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집에 가면 이런 여유는 꿈도 못 꿀 거라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집에 빨리 가고 싶을까.

이유는 그날 밤에 바로 알게 되었다.

함께 일찍 소등을 하고 누웠다. 한여름이라 당연히 에어컨이 켜져 있었는데 나는 에어컨을 켜고는 절대 못 자는 사람이었지만 내가 추우니까 에어컨을 끄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는 에어컨을 끄고는 절대 못 자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대신 이불을 하나만 더 가져다 달라고 실장님께 부탁했는데 그걸 들으시고 ‘강윤 씨 추웠구나. 말을 하지.’하면서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에어컨 온도를 높여주셨다.

순간 눈물이 났다. 병실 메이트 분들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여름에도 추운 거 싫어하는 나를 위해 한 번도 에어컨 켜자 말한 적 없는 남편과 아이 생각이 속수무책으로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고 싶어서 그토록 집에 가고 싶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에어컨을 핑계 삼아 깨닫고는 베갯속을 적시도록 울었다. 흑흑.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 사이로 속삭이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왜 우는 거야? 어디 아픈가?”

“애가 보고 싶어서 울겠지. 아휴 마음 아파.”     



나에게는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시는 게 너무 귀엽다고, 엉엉 우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그렇게 요양원에서의 첫날이 지나고 있었다.      



요양병원의 생활은 마치 여고 생활 같았다.

아침부터 일과시간 동안은 각자의 치료 스케줄 따라 움직였는데 나는 보조 치료를 최소한으로 받고 휴식하기만을 원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은 책을 읽으며 보냈다. 하루의 마지막 일정인 저녁을 먹고 나면 그때부터는 각자의 침대에 앉아 무한 수다가 시작되었다. 벌써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떻게 자랐는지 부모 형제는 어땠는지, 어떻게 가정을 꾸려서 살아왔는지, 남편과 자식들 이야기, 하는 일, 종교, 인간관계, 돈 문제, 건강 문제는 말해 뭐 해.

주제를 막론하고 모든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일주일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내에 어떤 사람에 대해 이렇게나 내밀하게 알 수 있는 곳은 요양병원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남 신경 쓰지 말고 나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신 분들이면서 생판 남인 나를 위해 식판 수거도 대신해 주시고, 어지럽혀진 이부자리도 정리해 주시고, 간식으로 나온 사과도 깎아주시고, 추워하는 나를 위해 에어컨도 잘 켜지 않으셨다.

나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말이 나만 생각하라는 말은 아니라는 걸,

일주일 동안의 요양병원 생활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내가 퇴원하기 전 날 밤에는 오가면서 인사를 나눴던 다른 병실에 계셨던 분들까지 (몰래) 우리 병실에 모였다.

     


‘이제 우리 막둥이 이제 못 보니까 오늘 밤새야지!’



마치 여고 수련회 마지막 날 밤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나는 캠프파이어에서 촛불을 들고 진실게임을 하는 여고생처럼, 처음으로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꺼냈다. 그때는 엄마가 돌아가신 지 1년도 채 안 되었을 때라 엄마라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어하던 때였지만 어쩐지 이 분들에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말하고 싶었다.

모두 나를 꼭 안아주셨다.

그 순간에 받은 따뜻한 위로가 엄마의 죽음을 좀 더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두런두런 동네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던 어린 날처럼,

요양병원 병실에서 새롭게 만난 어른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막둥이 잔다. 어머어머 졸려서 눈 감기는 것 좀 봐.’

‘우리 딸 같아. 귀엽다.’     



잠이 드는 와중에도 언제나 다 들리게 속삭이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으며 기분이 좋아졌던 그때.

지금도 가끔 자려고 눈을 감고 있으면 속닥속닥 다 들리게 속닥거리는 나의 요양병원 메이트, 다정한 어른들의 목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오늘 밤엔 오랜만에 연락드려봐야지.  

또 한여름이 찾아왔다고. 건강하시라고. 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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