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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Jul 16. 2024

첫 생리와 마지막 생리

episode 3.




나만큼 첫 생리와 마지막 생리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의 첫 생리는 밀레니엄과 함께 시작되었다.

2000년 3월 10일, 그날은 나의 열두 번째 생일이었다.

초등학교 안에서는 가장 선배가 됐기 때문에 집에서 엄마의 주관으로 열리는 생일 파티는 어쩐지 유치해 보일 무렵이었다. 대신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 친구들과 우르르 분식집으로 몰려가 떡볶이와 어묵, 튀김 같은 것들을 실컷 먹고는 다시 친구네 노래방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came in to my life ye~ make me fly again ye~ 핑클의 NOW를 미친 듯이 열창하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설마 너무 신난 나머지 오줌을 쌌나? 불길한 마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팬티를 내렸을 때, 수줍게 물들어 있던 짙은 붉은색의 동그라미는 여전히 잊을 수가 없다.


또래보다 좀 이른 생리였기 때문에 아직 대처법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당황한 채로 우선 휴지로 쓱쓱 닦아냈다. 그리곤 번쩍번쩍 정신없이 빛나는 노래방 조명 사이로 가장 키가 크고 의젓했던 여자애를 불러냈다.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애가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본인의 가방에서 생리대 하나를 꺼내더니 차근차근 생리대 착용법을 설명해 주던 모습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렇게 나는 노래방 화장실에서 역사적인 첫 생리대 착용식을 마쳤다.



그날 저녁 아빠가 사 온 생일 케이크는 나의 열두 번째 생일과 함께 첫 번째 생리도 축하하며 일석이조의 큰 몫을 다할 수 있었고. 의도치 않았지만, 넘치는 축복 속에서 시작한 나의 생리는 열두 살부터 서른다섯이 되던 해까지 꼬박 22년 동안 매달 빠짐없이 등장했다.

(임신기간 열 달을 제외하고)

그러고 보면 내 인생에서 생리만큼 이토록 꼬박꼬박 했던 게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매번 정확한 주기에 정확한 기간 동안 정확한 양으로 찾아왔다.

이렇게 건강한 생리 역사를 가진 사람이 어쩌다 자궁암이 걸렸나 궁금할 정도로.   



  

나의 마지막 생리는 2022년 7월 15일. 그 생리가 끝나자마자 산부인과에서 건강검진을 했었는데 그 검진에서 자궁내막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출산을 꼭 원하는 사람들은 약물치료를 하면서 임신, 출산이 끝난 이후에 자궁적출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 출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수술하는 게 좋다는 의사의 의견에 따라 고민할 겨를도 없이 수술대에 눕게 되었다.


그때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모드였기 때문에 자궁이고 생리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수술 후 정신을 좀 차렸을 때야 환우가 모여있는 인터넷 카페에서 자궁적출 수술 이후 갑자기 찾아온 갱년기 증상과 상실감으로 우울증까지 앓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길 보곤 깜짝 놀랐다. 내 몸에서 작동하던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걸 그제야 자각한 것이다. 하지만 자궁을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지 딱히 실감 나지 않았다. 그냥 매우 아프다는 생각밖에는.      




수술 후 퇴원을 하자마자 아이를 만나기 위해 시댁으로 향했다.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차의 조수석에 앉았다. 방수 테이프가 큼지막하게 붙어있는 수술 부위에 본능적으로 손을 얹은 채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눈치를 살피던 남편은 조용히 라디오를 틀었다. 마침 그 시간엔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방송 중이었고 마침 내가 좋아하는 가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 없지만 안녕히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 빛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너와 내 맘에 살아 숨 쉴 테니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 모퉁이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하나 둘 추억이 떠오르면

많이 많이 그리워할 거야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순간 내 손이 얹혀있는 이 어디쯤 서른다섯 해 동안 생생하게 살아 숨 쉬던 자궁이 저 별의 자리처럼 사건의 지평선으로 완전히 사라졌다는 실감이 나며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꿈에도 몰랐던 일이 이미 벌어지고 말았다는 아득함, 앞으로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 어찌 되었든 직면해야 한다는 책임감, 방심하면 뒤통수를 날려대는 인생의 이면에 대한 원망,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초연함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들이닥치는 기분이었다. 노래는 그렇게 꾹꾹 감추고 있던 걸 기어이 꺼내놓게 만든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마음속 깊이 자궁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내 몸의 일부가 되어줘서 고마웠어. 내 몸 안에서 열심히 일해줘서 고마웠어. 무엇보다 나의 딸 우주를 품어주고 키워주고 무사히 내 품에 보내줘서 너무너무 고마웠어.”하고.

비록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잠든 채 얼렁뚱땅 헤어져 버렸지만, 사실 진짜 이별은 그날의 차 안에서 이루어졌다. 윤하의 단단하고도 따뜻한 목소리를 위로 삼아.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은 어떤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느 영역 바깥쪽에 있는 관측자에게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찰나, 그 시공간 영역의 경계를 말한다.

한때 서로에게 큰 영향력을 주고받던 존재가 이별 후에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흘러가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상태를 비유하는 노랫말.

그래서 우리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헤어진 연인을, 먼저 떠난 가족을, 무지개다리를 건넌 반려동물을 그리고 자궁을 떠올린다. 내 몸이었지만 이제는 내 몸이 아니게 된 나의 자궁을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노래가 그저 이별의 슬픔에서 이야기를 끝마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건의 지평선은 끝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는 길모퉁이므로 낯선 세계 너머로 힘차게 나아가라고 계속해서 말해준다.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언제나 너와 내 맘에 살아 숨 쉴 거라고. 그러니까 이별의 두려움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 가라고.      



자궁은 나에게 애증의 당신일까. 사실 같이 있을 땐 특별히 사랑하지도 더욱이 증오하지도 않았다.

떠나보내고 나서야 괜히 사랑한다고 소리쳐도 보고 가끔은 원망 섞인 증오를 보내보는 존재. 헤어지고 나서야 생긴 이 애증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겠을 땐 그냥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을 듣고 또 들었다. 물론 나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신기하게도 이 노래는 내가 치료를 종결했을 즈음 갑자기 입소문을 타서 역주행하더니 각종 음원차트에서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세상에나. 동갑내기인 가수가 다시금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자궁 없이 살아갈 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이라도 한 듯 쓰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방치해 둔 생리대 뭉치를 보자기에 고이 싸서 옷장 깊숙이 넣어 두었다. 그리고 지파운데이션에서 생리대가 부족한 여성 청소년을 위한 생리대 후원을 시작했다.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중에 가끔 두려움이 드리우면 열두 살 첫 생리를 시작했던 그때처럼 노래방으로 가 소리를 꽥꽥 지르며 열창을 하기도 한다.

내 인생의 역주행을 무모하게 꿈꿔보며.            




우리는 선택한 대로 살아간다.

설령, 선택이 정해져 있더라도.

모든 선택은 고민의 끝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끝은 저마다의 기준으로 시간을 일단락한다.

모든 탄생은 끝에서 시작된다.

예외는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윤하 정규 6집 <End Theory: final edition> 앨범 소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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