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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Jul 09. 2024

나의 암 수술일지(1)

episode 2.

   


흔히 ‘암’을 교통사고에 비유하곤 한다.

본인이 암에 걸릴 것이라 예견하며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특별히 무슨 잘못을 해서 벌어진 일도 아니고 애를 써서 막는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사고처럼 닥치는 것뿐.

나 역시도 정말이지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암 진단을 받았으니, 아니 내게로 내리쳤으니까 말이다.


나는 이제 막 암 진단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미친 듯이 정보를 찾아보다가 암 환우가 모여있는 카페에 가입해서 ‘자궁내막암’에 관한 글을 모두 읽고 희망 회로를 돌렸다가 절망했다가 무서워서 휴대폰을 던져버렸다가 다시 주워서 관련 논문까지 찾아 읽는 걸 반복했다. 사실 나는 당시 엄마를 떠나보낸 애도 기간도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상태로 수술과 치료에 돌입했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참혹해져 있는 상태였다. 투병 기록이든 하소연에 가까운 일기든 뭐든 쓸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고 변명하고 싶지만 박완서 선생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을 읽다 보면 그 핑곗거리 마저 부끄러워진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통곡 대신 글을 써서 책으로 엮어내셨으니 말이다.


사실은 현실을 직시하기 무서웠기 때문에 그러니까 글로 남기면 진짜가 될 것 같아서, 그냥 없었던 셈 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한 글자도 쓰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어쩜 이렇게 메모한 줄이 없는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써보려고 하니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괴롭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막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적어주는 진단과 수술까지의 세세한 과정이나 생동감 넘치는 수술 전과 후의 에피소드나 후기들을 읽으면서 도움이 많이 됐었기 때문에 기억나는 데 까지는 적어보고자 한다. 아이폰 캘린더를 힌트 삼아.    

   

8월 4일 암센터 초진일. 국립암센터 신관 3층 자궁난소암센터 진료실 앞 대기 의자에 앉아서 내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장소는 내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곳이지만 그때는 말 한마디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해 손에 땀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강윤이 님, 들어오세요.’

주치의는 예상보다 젊고 에너지 넘치는 분이었다. 초진이라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하셨는데 사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고 심지어 그 대답조차 모두 남편이 했다. 나는 다리를 덜덜 떨며 의사 선생님이 입은 흰 가운에 파란색 자수로 박혀있는 이름 석 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실력 있는 의사. 연구도 많이 하는 의사. 젊은 의사. 친절한 의사. 날 살려 줄 의사..  

‘강윤이 님, 많이 힘드세요?’ 넋이 나가 보였는지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나는 그때도 입이 안 떨어져 대답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내가 좀 어이없기도 웃기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괜찮습니다. 지금 상황으로 봤을 때는 병변은 심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이고요. 수술하면 괜찮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이미 출산 경험도 있으시니 자궁적출을 선택하는 데 어려움도 없고, 자궁적출 수술은 로봇 복강경 수술로 진행하면 수술 자국도 별로 남지 않고요.”     


어려서부터 엄마는 내가 항상 선생님 복이 있다며 어딜 가든 좋은 선생님을 잘 만난다고 했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도 잘 만나는 걸까. 유난히 친절했던 동네 산부인과 의사부터 그 의사가 추천해 줘 만난 암센터의 주치의도 긍정적이고 유쾌한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었다. 전문가의 긍정적인 말 한마디가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처럼 귀하고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내 몸에 피가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섰고 덕분에 그 이후에 예정된 많은 검사들을 꽤 씩씩하게 미션 수행처럼 해낼 수 있었다. MRI, 대장내시경, 위내시경, PET CT 모두 처음 해보는 검사였다. 걱정을 많이 했던 MRI나 PET CT는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고 검사가 끝나고 물을 많이 마시라는 글을 어디서 주워 읽고는 끝나고 물 한 통을 열심히 마셨던 기억이 난다. (검사가 끝나자마자 많이 마시는 게 좋다고 하니 검사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의외로 대장내시경이 더 힘들었는데 검사 전날 복용해야 하는 약을 다 챙겨 먹는 일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수술 전 날에도 관장을 위해 그 약을 먹어야 했었는데 좀 보태서 말하자면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게 수술만큼이나 힘들었다.


8월 11일에 주치의 진료를 마치면 바로 간호통합병동으로 입원해서 12일에 수술을 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캐리어에 입원을 위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을 쌀 때는 유방암 환우였던 양선아 작가님이 쓰신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라는 책을 보고 참고해서 쌌다. (혹시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쓰는 준비물 리스트: 속옷, 끈 없는 실내화, 수건, 가제 수건, 휴지, 물티슈, 세면도구, 물통, 물컵, 빨대, 생리대, 무릎담요, 얇은 이불, 생수, 뿌리는 샴푸, 핸드폰거치대, 멀티탭, 충전기, 이어폰, 양말, 머리끈)    

 

8월 11일 두 번째 주치의 진료. 이날은 그동안 했던 모든 검사의 결과와 다시 진행된 조직검사의 결과까지 나오는 날이어서 초진 때보다 더 긴장한 채로 대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톱을 계속 물어뜯고 있었더니 남편이 내 손을 끌어 꼭 잡아주었다.

“강윤이 님, 들어오세요.”  

진료실에 들어서면 나는 항상 선생님의 얼굴을 관찰한다. 대개는 무표정이지만 아주 미세하게 희비가 드러나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날은 선생님의 표정이 무척 밝았고 예상대로 모든 검사에서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찌나 기뻤는지. 새로 진행한 조직검사 결과 1기에 분화도 1로 예상되기 때문에 로봇 단일공 복강경 수술을 통해 자궁 본체와 나팔관, 그리고 양쪽 림프절 하나씩만 제거하는 것으로 수술의 가닥이 잡혔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와 남편과 나는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오빠 1기 분화도 1이면 5년 생존율이 95% 이상이야."


나는 우는 와중에도 그동안 공부했던 지식을 뽐내며 이제 나는 살았다고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기뻐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계속 살 수 있음에 기뻐한 적은 없었는데. 목숨 앞에서는 그저 목숨만으로 감사하고 오로지 목숨 외에는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최종 기수는 수술 이후의 조직 검사를 통해 결정되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 나의 경우도 바뀌었다.)

     

그 길로 바로 입원병동으로 이동했다. 미리 캐리어를 싸 올 정도를 야무지게 준비를 마쳤음에도 막상 수술을 위해 입원한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고요하게 침잠되어 있는 듯한 입원 병동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기분이었다. 입원 전에는 간호사 선생님과 상담을 통해 여러 동의서를 받는다. 여러 자료를 앞세우며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는데 한 질문에서 도저히 입이 안 떨어졌다.


“이 수술에 동의하신 것 맞나요?”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는 이 수술에 동의한 게 맞을까. 수술하면 마냥 다 좋아질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내 몸 안에서 작동하는 무언가를 없앤다는 생각은 안 해봤었기 때문에 순간 두려움이 앞섰다. 대답을 못 하고 있으니 간호사는 계속 나를 갸우뚱 쳐다보다가 “환자분, 원래 말을 못 하세요?”하고 쏘아 물었다. 남편은 지금까지도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 깔깔 웃어대지만 나는 같이 웃다가도 이내 찜찜해진다. 진짜 말을 못 한다고 생각했든 아니면 대답을 빨리하라고 보챈 것이든 둘 다 무례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입원 수속을 모두 마쳤다. 간호통합병동이었기 때문에 보호자는 함께 상주할 수 없어서 남편은 짐만 들여 주고 바로 나갔다.


환자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니 갑자기 영락없는 환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가 젊은 환자라는 게 싫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머어머 저 여자 젊어 보이는 데 불쌍해서 어쩌니.’ 이런 말을 듣는 게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그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배포있게 1인실을 사용했다. 물론 가족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기에 오는 연락도 없었고. 그저 딸과 영상통화를 하거나 명상음악을 들으면서 누워있거나 읽었던 수술 후기를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중간중간 수술 전후로 지켜야 할 주의 사항들을 교육받는 시간이 있어서 열심히 받고 돌아와서는 치료계획표를 또 꼼꼼하게 읽었다. 수술 전날에는 무조건 밤을 새우겠구나 예상했는데 의외로 몇 시간을 푹 자고 일어났다. 이른 아침 상쾌하게 일어나서 수술을 위해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다리에는 발까지 내려오는 압박스타킹을 신었다. 그리고는 이 모습을 남겨두고 싶어 제법 의연하게 거울셀카도 찍었다. 병원에서 혼자 보내는 하루 동안 스스로 마음 정리를 하며 많이 비웠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오후 1시쯤 되었으려나 수술을 곧 하러 갈 거라고 간호사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다. 나가보니 내가 앉아서 이동할 휠체어가 있었고 병동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도 함께 이동하기 위해 들어와 있었다. 남편은 울면서 웃는 얼굴로 계속 괜찮을 거라고 되뇌였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안 괜찮아 보여서 웃겼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 수술장으로 안내해 주시는 분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그 시간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수술장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들어가야 할 때가 왔다. 남편은 휠체어에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내 발목을 붙잡고 울었지만 나는 울면서 들어가고 싶진 않아서 꾹 참았다. 안에 들어가서도 다시 또 대기. 대기하면서 내가 어디를 수술하는지, 어떻게 수술하기로 했는지, 몇 번이나 자세하게 물으셨고 나는 마치 면접 보는 수험생처럼 그 어느 때보다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곧이어 수술을 받을 수술방으로 이동하기 위해 휠체어에서 침대로 이동했다. 나는 이동하는 내내 눈을 꼭 감고 있어서 주변을 보지는 못했지만 점점 차가워지는 공기에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내 인생 그 어느 때에도- 대학 합격통지 받았던 날, 취업 성공했던 날, 결혼식 날, 아이를 낳았던 날, 심지어 마라톤 10km 완주를 했을 때에도 이 정도로 심장이 뛰지는 않았었는데.


수술방에 도착해서는 의료진들이 시키는 대로 수술대에 올라 누웠다. 수술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따뜻한 핫팩 같은 걸 몸에 대주셨던 것 같은데도 계속 몸이 심하게 떨렸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딸아이가 입원 전에 쥐어준 편지를 계속 내내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그래도 나도 모르게 계속 몸을 벌벌 떨며 눈을 못 뜨고 있었는데, 수술팀 의료진 한 분이 내 옆에서 서더니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많이 춥죠? 하면서 내 손을 내내 쓸어주었는데 그 목소리와 손길이 너무너무 따뜻했다. 이 병원은 원래 이렇게 친절한가? 대체 어떤 분이실까 너무 궁금해서 용기를 내어 눈을 살짝 떴다. 눈이 마주치자 그분은 ‘금방 끝날 거예요. 다 괜찮을 테니 걱정 말고 푹 자요.’하고 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엄마였을까. 그 눈빛이, 손길이, 목소리가 너무 따뜻해서 몸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렇게 낯선 여자가 베푼 온기에 기대어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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