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4.
나는 스물여덟, 아주 어리지도 않지만 사실은 제법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았다.
하여튼 내 자궁은 그때부터 평범하지 않았고 짧은 자궁경부 길이 때문에 조산을 면치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는 주수에 비해 작았고 자궁수축억제제를 맞으며 버티고 버텨 36주에 2.14kg,
이른둥이이자 저체중아로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엄마와는 인사도 못한 채 아빠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근처 대학병원에 신생아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다. 그때의 나는 매일매일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아이 대신 제가 아프게 해 주세요.’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도 모르게 팔 년 전의 그 기도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지금이 이 상황이 그 기도의 응답이라면 그래, 마음 편하게 아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아이 대신 엄마가 아프면 아이를 돌봐 줄 이가 없다는 걸 말이다. 이제 제법 어리지 않게 된 나는 다른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왔다.
‘하나님, 제발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
매일매일 같은 기도를 하며 수술 날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밤, 아이와 침대에 함께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 좋아하는 아이돌, 태권도 관장님 이야기 끝에 아이가 불쑥 물었다.
“근데.. 엄마 수술해?”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자동반사적으로 아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평소와 다른 집안의 분위기와 주변 가족들의 반응들로 충분히 눈치챌 만한 나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그럼, 엄마도, 수술하다가 할머니처럼 죽을 수 있는 거야?”
아차. 내가 잊고 있던 게 너무나 많았구나.
숨이 턱 막혔다.
수술하러 들어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외할머니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바로 그 이듬해 할머니처럼 수술을 하러 가는 엄마가 할머니처럼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있는 줄은, 그만큼 많이 큰 줄은 정말 모르고 있었다.
“아냐. 엄마는 우주가 어른 될 때까지는 절대 절대 안 죽어. 할머니도 엄마 어른 되고 결혼하고 우주 낳는 것도 다 보고 하늘나라로 갔잖아. 엄마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걱정 마.”
나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호언장담을 하고 돌아서서 하나님께 다시 빌고 또 빌었다.
‘하나님, 다른 건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을게요. 그냥 아이가 다 클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살다가 가게 해주세요.네?‘하고.
수술을 위해 입원하면 일주일 넘게 아이를 못 보게 될 예정이라 아이는 아빠의 본가인 할머니네 집으로 갔다. 방학이라 따로 학교에 이야기할 필요도 없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때로 불행은 빚지고 있던 감사를 한꺼번에 갚게 한다는 걸 알았다.
아이의 짐을 싸면서 스케치북 하나에 매일매일 넘겨볼 수 있게 상상력을 발휘에 미래 편지를 써두었었다.
그 스케치북 편지는 여전히 아이의 보물 상자에 고이 담겨 있어서 이 글을 쓰기 위해 몰래 꺼내봤다가 아주 오랜만에 울었다. 발신자인 나와 수신자인 아이의 동의를 모두 구해 공개한다.
이 스케치북 편지의 제목은 ‘여덟 살의 여름방학’
8.12
우주야, 엄마가 수술한다는 건 이야기해 줬지?
엄마는 지금 우주가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 있었던 그 자리에 나쁜 세균이 생겨서
그걸 없애는 수술을 하는 거야. 그 자리 이름을 자궁이라고 해.
엄마 말고도 자궁이 아파서 수술하는 사람은 정말 정말 많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리 엄마 수술 잘 끝나게 해 주세요’하고 말하면, 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거야.
원주 할머니가 수술하러 갔다가 하늘나라로 간 일 때문에 우주는 엄마가 수술하러 가는 게 많이 불안했지?
하지만 엄마는 그럴 일 없을 거야. 왜냐면 하늘나라로 간 할머니가 엄마를 지켜주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우주 불안해하지 말고 마음 편안하게 서울 할머니랑 지내고 있어. 알았지?
우리 우주 벌써 너무 보고 싶다. 오늘도 사랑해.
8.13
우주야, 오늘은 우주가 좋아하는 토요일이네! 학원도 안 가고 숙제도 안 해서 좋겠다.
그래도 밀린 숙제는 틈틈이 해두는 게 좋아. 나중에 한꺼번에 하려면 더 힘드니까.
우리 우주 이번 주말에는 뭐 하면서 놀고 싶어? 할머니랑 고모랑 다 같이 재밌게 놀았으면 좋겠다.
엄마는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와서 회복하고 있어. 아직은 아프지만 그래도 참을만해.
엄마는 얼른 나아서 우주 만나러 갈 생각으로 열심히 운동도 하고 밥도 잘 먹고 있어.
우주도 엄마처럼 밥 잘 먹고 있지?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언제든 카톡으로 보내!
매일매일 사진도 많이 보내줘 꼭!
8.14
우주야 오늘은 일요일이다. 주말 잘 보내고 있지? 우주가 없는 주말은 너무너무 심심하고 외롭다.
얼른 우주랑 재밌는 주말을 보내고 싶어! 엄마는 오늘 수술한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이야.
퇴원해서 이제 더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다른 병원으로 가서 일주일 동안 있을 예정이야.
지금 마음으로는 당장 우주에게 달려가고 싶지만,
우주 개학하고 나서 엄마가 우주 더 잘 챙겨주려면 지금 쉬어둬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그래서 엄마는 우주를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고 새로운 병원으로 가고 있어.
오늘은 우주 목소리가 유난히 더 많이 듣고 싶네. 엄마한테 영상통화 많이 해줘! 사랑해 우주야
8.15
우주야 오늘은 월요일인데 공휴일이라 쉬는 날이다. 오늘은 광복절이야.
우주는 광복절이 무슨 날인 줄 알지? 광복절은 우리나라를 괴롭히고 가지려고 했던 일본으로부터 벗어나 우리나라를 지켜낸 것을 축하하는 날이야. 기쁜 날이지.
엄마도 그동안 엄마를 아프게 했던 나쁜 세포를 벗어나 엄마의 건강한 몸을 지켜낸 날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기쁘다. 물론 엄마 몸에 있던 한 부분이 사라져서 아직은 아프고 어색하지만 우주를 만날 때 즈음엔 많이 나아있겠지?
우주야, 이번 주는 방학 마지막 주야.
이번 주는 학원도 안 가고 서울 할머니네서 보내니까 더욱 좋지?
학교도 안 가고 학원도 안 가는 진정한 방학을 즐기는 한 주가 되길 바랄게. 사랑해 우주.
8.16
우주야, 잘 잤니? 엄마가 우주랑 열흘 동안 떨어져 있게 되었을 때 가장 걱정했던 것이 밤이었어.
늘 엄마랑 자는 게 익숙한 우주가 잠들기 힘들면 어쩌나 걱정한 거지. 이제는 엄마 없이도 잘 자고 있지?
우리 우주 얼마나 많이 컸을까.
엄마가 우주처럼 어릴 때 할머니가 가끔 할머니의 엄마를 만나러 갈 때가 있었어.
그러면 엄마는 엄마의 할머니랑 같이 집에 있었거든.
할머니가 잘 돌봐주시고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셨는데도 이상하게 엄마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불안하고 슬펐어. 그래서 매일매일 엄마는 언제 올까? 기다렸던 기억이 나.
우리 우주도 그렇겠지? 그런데 그때는 휴대폰이 없어서 전화 통화도 자주 못했고 영상통화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는데, 이제는 우리 언제든 영상통화로 얼굴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엄마 보고 싶을 땐 언제든 영상통화 걸어 알았지?
8.17
우주야 벌써 수요일이 되었네.
매주 수요일은 우주가 미술학원을 가는 날인데 엄마 때문에 못 가게 되어서 미안한 마음이 드네.
엄마는 우주가 그림 그리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우주가 그린 그림이 너무 신기해!
엄마는 그림을 잘 못 그리거든. 그래서 우주가 그려주는 멋진 그림을 보는 게 너무 좋아.
우주랑 같이 그림 전시회를 보는 것도 좋고. 엄마는 우주랑 하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다.
우주는 어때? 우주는 엄마가 퇴원하고 집으로 가면 엄마랑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뭐야?
엄마는 늘 우주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고 공부 가르쳐주고 같이 숙제하고 준비물 챙기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느라 우주랑 같이 놀아준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열흘 동안이나 엄마 못 만났으니 퇴원하면 엄청 엄청 많이 놀아줄게.
우주가 또 가고 싶어 했던 경복궁도 한복 입고 가 보자. 사랑해
8.18
우주야, 잘 지내고 있지? 아빠, 할머니, 고모 말씀도 잘 듣고 있지? 방학숙제도 잘하고 있고?
이제 곧 있음 개학이니까 그림일기, 독서일지, 운동일지 쓰는 거 잊지 말고.
준비물은 미리 다 챙겨뒀으니 걱정 말고.
우리 우주 2학기 때는 또 얼마나 멋진 모습일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그런데 우주야, 무엇이든 완벽할 필요는 없어.
우주는 늘 제일 먼저 도착하고 싶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준비하고 싶고 친구들보다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 엄마가 알아. 그 마음은 나쁜 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 거지.
하지만 무엇이든 우주 마음대로 완벽하게 하려고 하면 나중엔 우주가 너무 힘들어지게 돼.
그러니까 조금 틀려도 괜찮아, 조금 늦어도 괜찮아, 하는 마음으로 우리 이번 2학기를 보내보자.
우리 우주는 잘할 수 있을 거야. 엄마는 믿어.
8.19
우주야 안녕, 오늘은 금요일이야. 엄마는 어릴 때부터 금요일이 제일 좋았어.
금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이 들었거든.
우주가 이번 주 월화수목금을 어떻게 보냈을지 엄마는 너무너무 궁금하다.
엄마는 새로운 병원에서 푹 쉬면서 수술하면서 약해진 몸을 더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었어.
우주가 잘 기다려 줘서 엄마가 더 힘낼 수 있었던 것 같아.
우리 우주 너무 기특하고 고마워.
우리 우주 처음 태어났을 때 몸이 아파서 병원에 엄마처럼 열흘 정도 있었거든.
그때 엄마는 엄청 많이 울면서 우주를 기다렸는데 우주는 이렇게나 씩씩하게 엄마를 기다려 주고 있네.
엄마보다 우주가 훨씬 더 의젓하고 멋지다!
아, 그때 엄마가 매일 듣던 노래가 있어. 마법의 성. 우주도 한 번 들어봐.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이 너무 소중해, 함께라면.
사랑해.
8.20
우주야 안녕! 오늘은 드디어 이 스케치북의 마지막 장이네. 내일이면 엄마랑 우주가 만나는 날이야.
엄마는 이제 처음보다 훨씬 많이 건강해졌어.
아직 뛰거나 무거운 짐을 들지는 못해도 우주랑 같이 학교도 가고 학원도 가고 문구점도 갈 수 있어.
우주야 이제 엄마는 예전보다는 더 엄마를 생각하면서 살 거야.
그동안 엄마는 우주만 생각하면서 살았거든. 그게 우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이렇게 나쁜 세균이 엄마 몸에 생겨서 우주랑 열흘 동안이나 떨어져 있게 되니까 알겠더라.
엄마가 엄마를 잘 챙겨야 우주도 잘 챙겨줄 수 있다는 걸.
이제 엄마는 우주도 엄마도 챙겨야 해서 바쁘니까 우주도 우주 스스로를 챙기는 연습을 해야 해.
다 놀고 난 장난감도 스스로 치우고, 물도 스스로 떠먹고, 밥도 스스로 먹고, 스스로 옷 입고, 스스로 씻고, 스스로 숙제하고. 알았지?
스스로 하는 힘이 우주를 더 멋진 어린이로 만들어 줄 거야. 엄마가 약속해.
엄마 없는 열흘 동안 어땠어?
아빠, 할머니, 고모 덕분에 즐겁게 잘 보냈지?
우주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거 절대 잊지 마.
하늘에 있는 원주 할머니, 원주 할아버지, 서울 할머니, 태국 할아버지, 고모, 이모, 이모부, 삼촌, 선하, 그리고 엄마 아빠까지 우리 우주를 너무너무 많이 사랑한단다. 이유는 없어. 그냥 우주가 우주라서 사랑해.
보고 싶은 우주 얼른 만나서 엄마 꼭 안아줘. 사랑해.
P.S
병원에 입원하는 날, 누가 내 딸 아니랄까 봐 아이도 나에게 편지를 써 주었었다. 귀여운 핑크색 하트를 열면 그보다 더 귀여운 글씨로 엄마엄마엄마엄마엄마라는 글자가 깜지처럼 가득 채워진 러브 레터.
그리고 하트의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 엄마 사랑하는 거 잊지 마.’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버텨낸 여덟 살의 여름방학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