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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이 Jul 02. 2024

무사히 마흔 살이 될 수 있을까

episode 1.



10년 차 엄마, INFJ, 페스코 베지테리언, 취미는 연애 프로그램 보기, 특기는 편지 쓰기, 장래 희망은 파스타 잘 만드는 할머니. 무사히 마흔 살이 되길 매일매일 기도하는 사람. 나의 SNS 소개란에 쓴 글.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파악해야 하는 상황에서 딱 한 가지 정보만 알 수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가 매일매일 밤 잠들기 전 침대맡에 무릎 꿇고 앉아 어떤 기도를 하는지. 왜냐면 지금 나라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소원’이기 때문이다.

내 소원은 자기소개란에 늠름히 쓰여있는 것처럼, 무사히 마흔 살이 되는 것이다.     


2022년, 서른다섯이 되던 해 여름.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아이의 첫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함께 서점에 들러 읽고 싶었던 책 몇 권을 사 들고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사 먹고 있던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던 한 때에 어쩐지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가 달려들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채근에 못 이겨 자궁경부암 검사를 했던 산부인과였다.



“강윤이 님, 어, 다름이 아니고 지난번 했던 검사 결과를 빨리 듣는 게 좋을 것 같으니 내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오세요.”

“네? 왜요? 오늘부터 아이가 방학이라 너무 이른 시간에는 움직이기가 힘든데요?”



눈치 없이 천진난만한 내 반응에 매우 당혹스러워하던 간호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야, 너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하는 어지러운 목소리.

몇 번의 시간 조정 끝에 진료 예약을 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놀이터 벤치에 앉아 신나게 노는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햇볕에 휘날리며 윤슬처럼 반짝였다. 어쩐지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밤, 아직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알 것 같은 그러나 알고 싶지는 않은 낯선 불안함이 밤새 나를 덮쳐왔다. 휴대폰을 붙들고 밤을 꼴딱 새운 후 재택근무를 신청한 남편에게 아이를 맡긴 채 아침 일찍 산부인과로 향했다. 깊은 곳에서 보글보글 끓어대던 불안한 마음은 어느새 불쑥 솟아올라 용암처럼 넘쳐흐르고 있었다. 어지러운 목소리를 따라 마주 보고 앉은 의사 선생님은 내 앞에 몇 장에 서류들을 내어놓고 어쩐지 나보다 더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지난번에 검사했던 자궁경부암 검사지고요, 정상으로 나왔어요.”



아 다행이다. 내심 긴장해 참고 있던 숨을 몰아 내쉬며 방심하던 그때, 선생님은 뒷장을 넘기며 말했다.



“그런데.. 혹시 몰라 떼어봤던 용종 조직에서 자궁내막암이 나왔어요.”



자궁내막? 자궁내막암?



생리를 20년 넘게 했고 임신과 출산을 겪은 서른 중반의 여성임에도 자궁내막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무식한 인간이었을 줄이야.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자궁 모형을 들고 열심히 설명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노이즈 캔슬링 되어 마치 이명처럼 삐-하고 들렸다. 얼른 큰 병원 가서 수술하면 된다고 괜찮을 거라는 말은 그 와중에도 잘 들렸지만.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름의 암에 걸렸다는 사실에 압도가 되어 체면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환자들이 처음 암 진단을 받을 때 의사의 무미건조하고 성의 없는 태도에 두 번 상처를 받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너무나 친절한 의사 선생님이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거듭 위로하는 상황에 ‘아 진짜 큰일이 났긴 났구나’하는 본능적인 직감으로 더 공포에 질렸던 것 같다. 이런 걸 두고 배가 불렀다고 하는 걸까.


선생님은 본인이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의사들 사이에서 수술 실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하고 여성암 관련 연구도 열심히 하는 분을 안다며 암센터의 한 교수님을 추천해 주셨다. 나는 완전히 붕괴 상태에 빠져 뭐라 질문 하나 못한 채 겨우겨우 그 의사의 이름 세 글자만 휴대폰 메모장에 적고는 얼굴에 눌어붙은 눈물자국도 닦지 못하고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휘청휘청 걷는 나를 바라보며 간호사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괜찮을 거예요.

이렇게 친절한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은 건 행운인 건지 불행인 건지 잠시 헷갈렸다.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고 나와 햇볕이 작열하며 끓어오르는 거리를 오들오들 떨면서 걸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나 무사히 마흔 살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마흔 살이 되는 해는 암 진단 이후 5년이 지나 완치판정을 받을 수 있는 해이자, 그 당시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딸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이자, 내가 40대로 살아갈 기회를 얻는 해였다. 그 순간부터 마흔의 의미가 너무나 다르게 다가왔다.

언젠가는 당연히 되겠지만 별로 되고 싶지 않은 한낱 나이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자 바람이자 목표가 된 것이다.

건강도 부도 명예도 미모도 행복도 아닌 오로지 마흔 살.     



집에 문을 열고 들어서서 남편의 얼굴을 마주하자 또 눈물이 쏟아졌다.



“오빠, 나 암 이래.”



드라마에서만 숱하게 들었던 이 대사가 내 입에서 나올 줄이야. 남편이 뭐라고 답했던가. 기억은 안 나지만 나를 따라 울었던 것만은 정확히 기억난다. 훌쩍훌쩍 울면서도 곧바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던 것도.

이미 조직검사를 통해 암 진단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초진이 빠르게 잡혔다. 남편이 달력에 동그라미 쳐둔 빼곡한 병원 일정 옆에는 나란히 엄마의 첫 기일이 있었다.

아 맞다 그래. 나 친정엄마도 없는 암 환자가 됐구나.      



엄마는 2021년 8월 심장 수술을 받은 이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흘 만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나의 근원이자 원형이 갑자기 영영 곁에서 사라지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처절한 마음으로 매일매일을 살았더니만 덜컥 암에 걸려있었다. 솔직히 이대로 죽어서 엄마에게로 갈 수만 있다면 그것 또한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수술하는 것도 안 무섭고 죽는 건 더 안 무서웠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엄마 없이 살아야 하는 딸아이를 떠올리는 일이었다.

서른 넘어 엄마를 보내놓고도 이렇게나 못 견디게 서러운데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엄마 없이 느낄 설움과 공포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그 날밤, 초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새로 사준 아이 책상에 앉아 남편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그 편지의 끝 무렵에는 딸아이가 가장 좋아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대사를 썼던 기억이 난다.     



‘네 어머니는 너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볼드모트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랑이야. 그자는 너희 어머니가 너에게 준 것만큼 강력한 사랑은 그 자체로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흉터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표시도 아니지만.. 그렇게 깊은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을 베푼 사람이 우리를 떠난 뒤에도 어떤 보호막이 영원히 남는단다. 너의 살갗에 깃들어 있는 보호막이지. 그건 바로, 사랑이야 해리,’     



나의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자 동시에 우리 엄마의 아이인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렇게 긴긴 하루가 막을 내리고 내 인생의 새로운 서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p.s 브런치에 투병기를 쓰게 된 이유는 지난 2년의 시간을 기록해 두고 싶은데 혼자서는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너무 괴로워 메모 한 줄 하지 않았던 그 시간을 다시 복기하며 써 내려가는 게 힘들게만 느껴졌었거든요.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써보기로 결심하고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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